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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속 성철 큰스님]
해인총림 설치와 방장 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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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섭  /  2017 년 8 월 [통권 제52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77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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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큰스님은 1966년 가을 자운 큰스님의 권유로 김룡사를 떠나 출가 사찰인 해인사로 옮겨 백련암에 머뭅니다. 1967년 종단은 수행 가풍을 드높이기 위해 총림을 설치하기로 하고 해인사에 첫 총림을 설치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철 큰스님은 역사적인 해인총림이 설치되면서 초대 방장으로 추대됩니다. 해인사는 과거에 가야총림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기사에는 해인총림과 방장 성철 큰스님을 향한 기대와 함께 걱정의 시선도 느낄 수 있습니다.

 


방장추대장(1967년)

 

 

<대한불교> 206호, 1967년 7월 23일 3면

23일 해인사에서 종단 중진회의

 

25~26일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 앞서 종단 중진회의가 23일 해인사에서 열리게 된다.

 

65년 6월 12일에 통합종단을 이탈한 일부 인사들이 낸 “종헌결의 및 무효확인 청구소송”이 서울지법에서 원고측의 승소 판결이 있자 동래 범어사에서 가졌던 중진회의 이후 처음인 중진회의는 청담 종정이 소집한 것으로 교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중진회의는 상임기구가 아니고 종단자문격으로 거종적인 비상사태가 있을 때나 종단의 의견을 통합하자는 뜻에는 열리는 것이 관례이었는데 이번 회의는 16회 임시중앙종회의 자문적인 구실을 할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이번 중진회의에서는 청담 종정의 큰 목표의 하나인 종단 자체 정화의 문제가 코로즈업되고 이에 따라 총림 실시 문제, 포교사 양성의 적극화 등이 논의될 것 같다.

 

중진회의에는 청담, 벽안, 월하, 허운, 성철, 탄허, 석주, 자운, 서운, 일타, 혜정 등 30여 명의 스님이 참석하게 될 것이다.

 


해인총림 준비를 위해 모인 스님들

 

<대한불교> 212호, 1967년 9월 3일 3면

해인총림 방장 성철스님

 

◇ 지난 7월 종회에서 해인총림 방장화상으로 추대된 성철 스님은 해제 다음날 “보국대로 징발당했다”고 말하면서 백련암에서 해인사 큰절로 내려왔다. 말하자면 이제 밀폐된 성곽을 벗어나 ‘참여의 장’으로 강하한 것이다. 대적광전 동편에 자리잡은 염화실로 스님을 찾아가 신변과 총림의 구상 등에 관하여 타진해 보았다. ◇

 

○… 출가 수도한 지 설흔 두 해째, 지금까지 한 번 회의 같은 데 참석한 일이 없다는 스님은 기자의 방문을 받고 “앞으로의 불사를 위해서”라고 하며 껄껄 웃고 개구(開口)….

 


 

 

후리후리한 키에 상대편을 꿰뚫을 듯한 안광(眼光), 수척한 편이지만 건강한 골격. 바른쪽 눈까풀에 녹두알 만한 사마귀가 별나다. 억양이 강한 영남 사투리. 1912년 지리산 자락인 산청의 단성에서 출생. 검소한 의복, 한겨울에도 속옷을 입지 않는 성미다. 음식은 싱거운 것만을 자시고 맵고 짠 것은 거의 안 먹는다. 장경각을 따로 가지고 있는 스님은 장서가 몇 권이나 되냐고 캐묻는 바람에 한 4천 권 될 거라고 실토. 그중에는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진귀한 서적도 있다. (남경판)『대장경』 그 한 질이 2천 권이 넘는다.

 

대개의 장서가 그렇듯이 스님도 책을 끔찍이 아끼면서 빌려주지 않기로 유명하다. 이유인즉 “주면 잃어버링께”—. 그리고 대부분 단행본이 아니고 질책[全集類]이기 때문에 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와서는 볼 수 있죠?” 하는 물음에 끄덕 끄덕…. 좋아하는 책은 선문(禪文)으로서 『전등록』, 『염송』.

 

○… 스님의 ‘전매특허’는 찾아오는 신도들한테 ‘등록금 3천원’씩을 받는 일이다. 3천원이란 물론 한국은행권이 아니고 3천배의 참회 절을 뜻한다. 한꺼번에 절 3천배를 강권하는 것은 그만큼 철저한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라는 것. 절을 하고난 어떤 여신도 한 사람은 “20년 믿은 불교가 죄다 무너졌다”고 한다. 그래 스님은 “3천배 절한 그런 신심으로 불교를 믿으라”고—.

 

이와 같은 참회의 절로 말미암아 현대의학에서 내동댕이쳐져 사지에서 헤매던 어떤 간경화증 환자는 6개월만에 완쾌되었고 각혈을 하던 폐결핵 환자는 열흘만에 씻은 듯이 나은 부사의가 있었다. 이밖에도 상식의 세계에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일이 부지기수.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다. 불교는 그러한 생명과 능력을 지닌 자아를 개발하는 것”이라고 스님은 노상 말한다. 스님 자신의 지난 도정(道程)에서도 그러한 신념은 엿볼 수 있다. 생식(生食)을 장장 16년동안, 눕지 않고 앉아 정진하는 장좌불와를 꼬박 여섯 해— 범부로서는 엄두도 못 낼 기록이다.

 

“고불고조(古佛古祖)의 유훈을 다는 못하더라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스님의 생활신조라고 하였다.

 

○… 불교의 종합적 수도장인 총림에 관하여 스님은 이렇게 구상하고 있다.

총림운영의 기본 방침으로서 계·정·혜 삼학을 바탕으로 엄격한 계율과 일관된 이론 그리고 철저한 참선을 닦아 견성성불을 지상목표로 하겠다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여 “수도보다는 생계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요즘의 사원구조로는 밀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도저히 수도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우선 시급한 것은 일반인이 수도장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환경정리부터 해야겠다”는 것이다. 더위가 가시면 25년래의 도반인 청담스님을 비롯하여 함께 일할 수 있는 몇몇 스님들을 몸소 찾아가 모셔온 뒤에 본격적으로 총림운영에 착수할 것이라고. 한국불교의 사활문제가 곧 인재양성의 요람인 해인총림에 달렸다고 벅찬 사명감을 자각하고 있는 한, 스님의 “보국대로 징발당한” 보람도 여물어갈 것이다.

 

<대한불교> 227호, 1967년 12월 17일 1면

67년의 교계, 그 인물 그 숙제
해인총림 성철스님




 

‘성철스님’ 하면 우선 ‘괴팍하고 독선적인 스님’으로 일반에게 인상되어 있는데 가까이 대하여 보면 그런 선입관에는 얼마쯤의 수정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물론 연전까지 유별나게 거처 둘레에 철조망을 쳐놓고 아무나 불쑥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비승가적인 동작에서 찍힌 오해이리라.

 

그러므로 지난 7월 총림의 방장으로 물망에 올랐을 때에도 일부에서는 강한 반발이 있었다는 후문.

 

그러나 해인총림 방장으로 데뷰한 이래 그런 오해는 점점 무너져가고 있는 것 같다.
“대중을 시어머니처럼 여기고 있다”는 요즘 스님의 시선은 사뭇 조심성을 지니고 있다.

 

방장이란 말은 본래 ‘주지가 거처하는 방’을 가리킨 것인데 달라져서 ‘총림의 주지’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합수도장의 장인 방장은 선에만 치우치던 종래 선방의 조실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만한 인격’이어야 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스님이 방장으로 천거받은 역사는 ‘무더운 대낮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저 극적인 임시종회로 소급한다. 당초 총림의 구상은 그 당시 종정으로 계시던 청담스님이 몇몇 전위적인 두뇌들과 어울려 짜놓은 바 있었다. 그런데 ‘비장한 결단’에 따른 노을 속의 하산으로 하여 성철스님을 밀게 된 것이다. 선교를 겸한 투철한 안목과 미지수인 그 역량에 기대를 걸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스님의 언설을 들어보면 일관된 도그머(敎義)와 화두타파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 4천 권의 장서를 가지고 누구보다도 ‘언어문자’의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 무슨 컴플렉스라도 있는지 말끝마다 그 언어문자를 깔아뭉갠다. 물론 불립문자의 의지에서이겠지만 그러니까 한 말로 해서 ‘중국식의 선’에 너무나 투철한 분이다.

 


1967년 첫 동안거 기념사진

 

방장 자리에 오른 지 석 달 하고도 십여 일.
재래의 구조에서 이렇다 할 변화는 아직 없다. 암중모색치고는 꽤 신중한 기간이다. 그래 성급한 다혈질들은 “이게 총림인가?” “이럴 바에야 뭣 하러 맡았어.” 하고 보채싼다.

 

암중모색에서 새어나오는 소린즉 첫째 환경정리, 둘째 선실개조, 셋째 교육시정이라고 한다.

 

환경정리란 관광객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서 일주문 밖에 담쌓는 일이고, 선실개조는 참선하는 데 적합하도록 방사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며, 교육시설은 수선오도(修禪悟道)를 목표로 한 체계 아래 승가대학의 설립을 뜻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계획은 현 종단의 관심도와 경제문제 때문에 그 시제는 어디까지나 ‘먼 훗날형’이다.

 

그러나 문제는 보다 본질적인 데 있는 것 같다.
과거에 매달리는 회고적인 ‘대가리’가 아니라 먼 지평에 눈을 둔 슬기로운 ‘머리들’이 맞대어져야 한다.
1백 60여 명 되는 현 대중을 해제 후에도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과 어떻게 단계적으로 대학 수준까지 끌어올릴 것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지금 강원의 학과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전심법요(傳心法要)』, 『돈오요문(頓悟要門)』, 『영가집(永嘉集)』, 『육조단경』, 『임제록』, 『종경록(宗鏡錄)』 등으로 대체한다는데 과연 이런 교과내용에서 이 시대와 사회가 갈망하고 있는 종교적인 인물이 나오겠느냐는 것이다.

 

정규적인 학교교육을 받은 바 없다는 ‘순수성’만으로 현대교육의 최고 학부인 대학을 어떻게 구상하고 운영해갈 것인가는 차치하고라도 평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리에 밝지 못함과 인내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문제는 많다.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큰스님’들이 다 그러듯이 스님에게도 현장의식이 거의 부재다. 말하자면 역사의식이 희박하다는 말씀이다.

 


1967년 동안거 방함록

 

현대가 요구하고 있는 종교적인 지도자에게 역사의식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종교인’의 관심은 최면술이나 실험심리학의 겉핥기 이론에 보다는 이 현실에 무엇을 어떻게 기여해야 할 것인가에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이교(異敎)를 포함해서 모든 종파를 초월한 진리의 사도여야 할 우리가 비구다 대처다 선이다 교다 용성문하다 만공문하다 등등 우리 주변의 악순환을 선(禪) 일변도만으로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오늘 우리의 현실은 중국 당송시대의 그것이 아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기가 소속한 힌두교에서보다도 상대편인 이슬람교도 가운데에 동지가 더 많았다는 사실을 두고 생각할 만한 일이다.

 

스님이 하루 한 번씩 애서(愛書)가 있는 백련암으로 올라가는 일에서 어떤 해방감을 느껴서는 안 되겠다. 전 종단으로부터 무거운 사명감이 맡겨진 해인총림에다 심신을 내던질 순교적인 각오(자비)가 선행되어야겠다. 우리는 지켜볼 것이다. 선교에 투철한 스님의 작용을! 그리고 기대할 것이다. 걸핏하면 전가(傳家)의 보(寶)처럼 내세우는 ‘케논보고서’ 속의 무한한 그 능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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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섭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영상미디어의 불교 주제구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철선사상연구원 연구원과 금강대학교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외래강사. 대중문화를 통해 불교를 전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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