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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묵향을 더듬다]
화두 공부와 마음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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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섭  /  2017 년 10 월 [통권 제5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89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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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여위에서 비로소 인간 본유의 정신력이 전부 발휘되는 것이다. 여기서 신기난측(神奇難測)(주1)한 신통묘용(神通妙用)(주2)이 이러나는 것이니 하등(何等) 기구(器具)의 의용(倚用)(주3)도 없이 능히 삼천 년 전에 계외성운(界外星雲)(주4)을 통찰하여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우주 정법(定法)(주5)을 개진(開陳)할 수 있는 능력의 예이다.

 



 

 

기멸부정(起滅不定)(주6)하는 번뇌망상에 파뭇처 사는 일반 인간들에 있서서는 이러한 소식은 절대 이해부득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안상공론(案上空論)(주7)이 안이요 공부하는 구체적 방법이 있서서 그 방법에 의하여 진심갈력(盡心竭力)(주8)하면은 하인(何人)을 막론하고 전부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특이한 기적이 안이요 인간 개개가 전부 구유(具有)한 정신능력을 엇더한 특[22b]이방법에 의하여 이를 개발 사용함에 불과하다.

 

이 진여(眞如) 무심(無心) 유심(有心)의 삼위(三位)는 인간 본유(本有) 정신능력을 말함이라 하등 신기한 것이 없으나 실질적으로 자기가 공부를 하여 보지 않으면 대단히 이해하기 곤란한 것임으로 석가도 팔만대장(八萬大藏)이란 막대한 경전 속에 간곡히 이를 설명한 것이다.

 

일반 인간은 전부 유심위(有心位)에서 생멸하느니만치 철학 과학 할 것 업시 일반 인간의 정신적 유산(遺産)은 전부 이 유심위를 기초로 하여 발전된 것이어서 여하한 극단의 일탈(逸脫)에 있어서도 무심(無心) 진여(眞如)의 양위(兩位)는 이해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무심(無心) 진여(眞如)의 양위(兩位)에서 활용된 모든 정신능력에도 불급(不及)(주9)하는 것이다. 이 유심 위에서 노력 공부하면 일체 번[23a]뇌망상이 전연 소멸하고 무념무상(無念無想)한 무심위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무심위는 유심위와는 천지현격(天地懸隔)으로 인간의 지혜의 광명이 최초로 조금 그 빛을 발(發)하는 때인지라 무심위의 혜광(慧光)으로써 볼 때 유심위에서 활동하는 인간들은 전혀 암흑심야(暗黑深夜)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과 갓흔 것이다.

 



 

 

그리고 진여위는 무심위로써도 전연 측량할 수 없는 단계 이어서 무심위의 대보살들도 진여위에 있는 불(佛)의 정신능력 상태에 대(對)하여는 맹인이 단청(丹靑)을 대하는 것하야 도저히 이해불능한 것이다. 이는 불교를 과장 선전하려는 어떠한 휼계(譎計)(주10)가 안이요 일체 인간이 구유(具有)하는 정신능력을 설명함에 불과하는 것이다.

 

이만 하면 전기(前記)한(주11) 『원각경(圓覺經)』의 불설(佛說)은 이해할 줄로 생각한다. [23b] 즉 신심(身心)과 언어가 단멸한 무심위에서도 불(佛)의 친증처(親證處)를 규지(窺知) 못하거든 엇지 유사유심(有思惟心)인 유심위에서 여래의 심심(深深)한 대원각(大圓覺) 경계를 측량하리요. 이 유사유심(有思惟心)으로써 여래의 경계를 측탁(測度)하려는 것과 갓치 절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한 앞서 진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증지(證知)라 함도 또한 진여위를 말함이니 진여를 실증(實證)한 지혜란 말인 고로 진여증지(眞如證知)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유심 무심을 초출(超出)한 진여위에서만 능히 진여 묘리(妙理)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니 엇지 유심위인 과학 철학 등에서 논의하리오.

 

이로써도 에너지 보존칙(保存則)과 진여상주설(眞如常住說)이 근본적으로 판이(判異)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24a] 불교가 일반 과학 철학 종교 등 일반 세간 학문들과 본질적으로 상이한 점이다.

 



 

 

다. 삼단(三段)

 

유심위인 일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정신상태를 또한 삼단(三段)으로 분류한다. 즉 일(一)은 일상시(日常時)이니 취침 전의 전 생활이요, 이(二)는 몽중(夢中)이니 취침중 작몽시(作夢時)이요, 삼(三)은 숙면시(熟眠時)이니 취침중 무몽시(無夢時)이다. 이 삼단도 정신력을 발휘하는 발휘하는 데 중대한 관련이 있다. 일상시(日常時)은 보통 정신이 명료한 때요 작몽시(作夢時)는 정신활동은 있으나 일상시만큼 명료치 못한 때요, 숙면시(熟眠時)는 정신활동이 전연 정지된 때이다.

 

대범(大凡)(주12) 수도시(修道時)에 좀 노력하면 일상시에 공부가 간단(間斷)없이(주13) 여일(如一)(주14)이 되더라도 몽중(夢中)에는 전연 안 되는 것이며 대노력을 하여 몽중에 또한 공부에 간단이 없더라도 숙면[24b]시에는 공부 힘이 밋치지 못하고 간단(間斷)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부 실력 여하를 변부(付)하는 데도 이 삼시단계가 최중요(最重要)하여 자고로 공부과정의 준칙을 삼어왔다. 환언하면 일상시에 공부에 해태(懈怠)하지 안코 간단없이 여일(如一)히 노력하면은 내후(乃後)에는 일체 사중(思中) 기멸(起滅)(주15) 망상이 홀연 정지되며, 작몽시에도 일상시와 갓치 분명료료(分明了了)하여 부자유하든 몽중생활이 일상시갗이 자유하게 된다. 따라서 몽중과 일상과의 구별이 전연 소멸되여 몽중에도 공부가 간단이 절대 없게 되나니 이것을 몽교일여(夢覺一如)라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서도 숙면케 되면은 여전히 암흑상태이여서 공부 실력은 전연 불급(不及)하며 간단되고 만다. 여기서 또한 부단 노력하면은 숙면 중 암흑상[25a]태가 전부 소멸되고 숙면중에서도 정신상태는 항상 명명료료(明明了了)하여 혼매(昏昧)(주16)란 절대 없게 되는데 이 지경(地境)까지 도달하려면은 여간 노력으로는 지난(至難)한 것이다.

 

(주1) “기이하고 오묘하여 헤아릴 수 없음”
(주2) 수행의 결과로 나타나는 오묘한 작용.
(주3) “믿고 의지함”
(주4) 우리 은하계 바깥의 별.
(주5) “정해진 법칙”
(주6)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일이 정해지지도 않고 끊이지 않음.
(주7) 책상 위에서만 펼치는 헛된 이야기. 실현성이 없는 허황된 이론. 탁상공론(卓上空論).
(주8) “마음과 힘을 다함”
(주9) “미치지 못함”
(주10) 간사(奸邪)하고 능청스러운 꾀. 남을 속이는 잔꾀.
(주11) “앞에서 적은”
(주12) “대체로 보아”
(주13) “끊어짐이 없이”
(주14) 성철스님이 설명하는 ‘공부’는 화두공부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붙잡고 끊이지 않고 항상 화두가 하나가 되어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여일(如一)’이다.
(주15) “생각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주16) 어둡고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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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섭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영상미디어의 불교 주제구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철선사상연구원 연구원과 금강대학교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동국대학교 외래강사. 대중문화를 통해 불교를 전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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