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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불기자심(不欺自心), 벼락과 같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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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5 년 4 월 [통권 제2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613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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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평전’ 쓰는 김택근 작가 

 

 


 

 

봄 햇살이 기지개를 켜며 따사롭게 가야산을 품어 주던 날. 해인사 금강굴 역시 넉넉하고 포근했다. 비구니 선사(禪師) 혜춘 스님이 후학들을 제접했던 보현암과 눈을 맞추고 있는 금강굴에는 또 다른 비구니 불필 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불필 스님은 안거 때에는 울산 석남사 선원에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하고 산철에도 금강굴에서 수행을 계속한다. 그러고 보니 혜춘 스님과 불필 스님 모두 성철 스님을 만나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고, 평생 동안 오로지 정진만 한, 떼려야 뗄 수 없는 특별한 인연을 지닌 스님들이다.

 

팔순을 앞둔 노스님이 벌써 몇 시간째 가야산과 금강굴, 성철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
“고등학생 때 할머니와 고모를 따라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 갔어요. 길을 잃어 산기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어렵게 어렵게 천제굴에 도착했습니다. 할머니가 싸들고 간 음식과 과일을 보자마자 큰스님께서는 저와 고모한테 ‘이것 모두 들고 가서 저 산 아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당신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셨던 것이죠.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눴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영원한 행복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어두운 밤에 흰 눈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또 여러 화두에 대한 말씀도 하셨고요. 제가 출가하는 데 결정적 결심을 하게 된 곳이 천제굴입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열반 전에는 큰스님께서 또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니, 내가 가면 내 같은 사람 또 만날 줄 아느냐!’ 이것이 큰스님께서 저에게 남기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아닌 스승으로 성철 스님을 모셨던 불필 스님의 회고에는 진한 여운이 있었다. 가족의 관계를 넘어서는 사제(師弟)의 정이 느껴졌다.

 

불필 스님의 말씀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도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따뜻했다.

 

불필 스님의 말씀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사람은 바로 김택근 선생님이다. 김 선생님은 <법보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성철 평전’의 취재차 불필 스님을 찾았다.

 

이른 점심을 먹고 시작된 인터뷰는 저녁 공양을 조금 앞두고서야 끝이 났다. 불필 스님과 김택근 선생님 모두 서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스님은 “큰스님의 진면목이 글에 담기고 있는 것 같아서…”, 김 선생님은 “평소 친견하기 쉽지 않은 불필 스님께서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씀해 주신 것 같아서…”, 고마워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찍은 남자

 

김택근 선생님은 종립(宗立)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 편집부장, 문화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출판본부장, <경향신문>의 인터넷 신문인 <경향닷컴> 대표를 역임한 언론인이자 시인이다. 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집필했고 평전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런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김 선생님이 성철 스님을 ‘재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인으로서 김 선생님은 한국 신문 역사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1982년 경향신문에 들어가 2011년 퇴직했으니 근 30년동안 기사를 썼습니다. 청춘, 아니 어쩌면 인생의 가장 왕성한 시기를 뉴스를 파는 ‘기사생산공장’의 소모품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경향신문> 재직 당시 ‘매거진 X’라는 별지를 창간하여 팀원들과 열정적으로 일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신문에서 섹션발행이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사건’이었습니다. ‘매거진 X’는 섹션신문의 새 지평을 얻었다는 평을 받았어요. 누구의 간섭도 없이 파격적인 문체와 소재, 그리고 편집을 통해 우리만의 감각이 펄떡이는 지면을 만들었습니다. 돌아보면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제가 퇴직할 때 후배들이 <경향신문>에 실린 제 글을 모아 책을 만들어 주더군요. 정말 고마웠어요. 그렇게 저와 제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행복합니다.”

 


김택근 선생님이 불필 스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생명과 평화, 환경 문제에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김 선생님은 이와 관련한 기사와 칼럼을 많이 썼고 자연스럽게 불교와의 인연도 만들어갔다. 특히 도법 스님, 지율 스님과의 인연이 깊었다.
“도법 스님과는 생명평화순례를 함께 했습니다. 주말이면 순례단에 합류해서 함께 걸었어요. 생명평화가 사라지는 현장을 찾아가 한마음으로 기도한 시간들은 저에게도 평화스러웠습니다. 지율 스님은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할 때 처음 뵈었습니다. 지율 스님이 <경향신문> 취재기자를 통해 저를 보고 싶다고 알려 와서 찾아갔습니다. 스님은 제 글을 좋아한다며 단식을 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시더군요. 저는 스님의 뜻에 공감하고 몇 번의 칼럼을 통해 응원을 했습니다. 또 지율 스님이 단식을 하며 지상에서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고 있던 여주 신륵사를 찾은 일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을 남기려 저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따뜻한 차를 내려 주던 그 앙상한 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지율 스님이 글을 통해 김 선생님을 알고 만나기를 청했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그렇게 찾아왔다. 김 선생님은 어느 날 ‘동교동’에서 찾아온 비서관 두 명을 만났다.
“대통령께서 제가 당신의 자서전을 쓰면 좋겠다고 하셨답니다. 생전 그렇게 냉철하고 빈틈이 없는 대통령께서 저를 ‘낙점’했다고 해서 많이 놀랐습니다. 비서관들을 통해 2004년 4월 저에게 연락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만들어졌고,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41차례에 걸쳐 대통령의 구술을 받았습니다. 또 미진한 게 있으면 수시로 찾아가 뵈었지요. 원고를 다 쓰고 보니 200자 원고지 5,600장 분량이더군요. 만 6년간의 작업 끝에 2권짜리 『김대중 자서전』을 완성했고 이어서 평전인 『새벽』을 발간했습니다.”

 


김 선생님이 백련암 고심원을 참배하고 있다 

 

김 선생님은 자서전 집필을 위해 사초 168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술, 일기, 연설문, 메모들, 국정 노트, 안기부에 끌려가서 취조 받던 당시 녹음된 테이프, 민주화운동 동지들의 증언 등 엄청난 자료를 참고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6년 넘게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8년 동안 김대중이라는 글 감옥에 있었습니다. 힘들었지만 행복한 여정이었습니다. 저는 글 감옥에서 ‘인간 김대중’을 봤습니다. 대통령님이 산인 줄 알았는데 정작 올라가 보니 실상은 산맥이었습니다. 성철 큰스님도 그렇습니다. 이제 또 다른 산맥에 다가서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철 스님에 대한 오해와 이해

 

앞서 밝혔듯이 김 선생님은 현역 언론인 시절부터 불교계와 관련한 칼럼을 적지 않게 썼다. 최근에는 <법보신문>에 ‘달빛 걸음으로 산사에 들다’는 기획물을 2년 남짓 연재하기도 했다. 사찰과 그 속에 서린 이야기, 또 스님들의 수행과 부처님의 가피 등을 담아내는 기획이었다. “꼼꼼하게 살피고 충분히 숙성시켜 전달하겠다고 ‘달빛 걸음’이란 제목을 달았는데 정작 ‘종종 걸음’이 돼버린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하지만 불교를 새로 알게 된 귀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원택 스님, 불필 스님, 김택근 선생님이 금강굴 경내를 살펴보고 있다 

 

불교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김 선생님은 처음부터 ‘성철 평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인연이 만들어졌다. 물론(?) 생전에 성철 스님을 친견한 적도 없었다.
“성철 큰스님은 저도 언론을 통해 알았습니다. 한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막연하게 ‘유식한 스님’, ‘깨달은 고승’, ‘누더기만 입는 청정승’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열반을 하셨는데 가야산에 수십만의 추모인파가 모였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야 새삼 성철이란 스님이 누군지, 왜 우리 사회가 산중의 스님을 그렇게 추모하는지 궁금해지더군요. 그런 분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났다는 게 서운하기도 하고요.


뭐 그런 정도였는데, 백련불교문화재단에서 원고청탁이 왔습니다. 성철 큰스님 관련이라면 어떤 소재도 괜찮다기에 수락했습니다. 그때 제가 쓴 원고가 『참선 잘 하그래이』에 실려서 출판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엄중한 시기에 성철 큰스님이 현실참여적인 발언을 하지 않음에 매우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한번 규명해보고 싶었습니다. 나름 성철 큰스님 행장과 남기신 글을 읽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성철이란 인물에 너무 이분법적으로만 접근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취재차 찾은 백련암에 선 김택근 선생님 

 

김 선생님의 얘기를 들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김 선생님은 성철 스님이 현실참여 발언을 안 한 이유나 배경을 이해하게 됐다는 말인가?
“딱 부러지게 이해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지금도 살피는 중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분에게 ‘대답’을 강요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보면 성철 큰스님은 종단 밖이 아닌 내부를 향해 죽비를 들었습니다. 가혹할 정도로 스님들을 나무라며 맑고 깨끗해지라고 일렀습니다. 저는 이를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참으로 부족한 너희들이, 그리고 정화되지 않은 불교가 과연 이 사회를 꾸짖을 수 있느냐’는 호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성철 큰스님은 보다 먼 곳을 보고 있음이 분명해보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불교의 중도(中道)란 가운데를 취함이 아니라 양 극단에 집착하지 않고, 마침내 그 가운데도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변(二邊)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정등각했다’는 부처님의 중도대선언을 붙들고 있었던 성철 큰스님에게 우리가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얘깁니다.”

 

김 선생님은 진지하게 말씀을 이어나갔다.
“가정입니다만 당시 성철 큰스님이 현실발언을 했다고 합시다. 지금 어떻게 됐겠습니까? 현실발언은 구호처럼 나부끼고 성철 큰스님의 진정한 가르침은 감춰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말씀도 이내 오염되었을 겁니다. 또 ‘독재로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걸 왜 외면하고 있는가?’로 질문을 비틀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현실이 아닌, 먼 미래까지를 바라보고 어떤 설법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성철 큰스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그런 비난에도 성철 큰스님은 일체 현실 발언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어찌 말해도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요. 제자들에게 ‘옳은 편도 들지 말라’고 이른 것이 하나의 상징이라고 보여집니다."

 

‘성철’ 산맥을 넘기 위한 사투

 

성철 스님을 추모하는 문집에 글을 쓰기 위한 공부치고는 꽤 깊게 연구를 한 듯 했다. 성철 스님 주위에서 머물렀던 사람들도 쉽게 내놓지 못하는 답변을 김 선생님은 거침없이 해나갔다. 결국 김 선생님은 성철 스님의 행장을 정리하는 일까지 맡게 됐고 그것이 다시 평전 작업으로 계속되고 있다.


“성철 큰스님의 법어집들을 읽다보니 개인적인 호기심이 생겼어요. 큰스님의 사상은 엄청 넓고 깊었습니다. 물론 큰스님께서 깨친 경지 근처에도 갈 수 없지만 성철 큰스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영원한 진리’가 무엇인지는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행장을 완성했는데 <법보신문>에서 평전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의가 왔습니다. 그렇게 고생길로 들어섰습니다. 하하.”

 


서재에서 작업 중인 김택근 선생님 

 

김 선생님은 성철 스님의 법어집은 물론 <선림고경총서>와 스님과 관련된 수많은 논문, 언론 기사, 말씀 자료 등을 섭렵하고 있다. 또 조계종 근현대사는 물론 동시대 우리나라의 역사까지 살피고 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불필 스님, 천제 스님, 원택 스님을 비롯한 제자들을 만나 시대별로 성철스님의 생애를 정리하고 있다.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다.

 

“무척 힘이 듭니다. 하하. 큰스님의 가르침이 면면히 스며있어서 혹시나 사실이 왜곡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성철 큰스님을 알고 있는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성철 큰스님을 공부하다 보면 가르침 모두가 무척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자기를 속이지 말라[不欺自心]’는 말씀을 우리 모두가 꼭 챙겨야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누구든 남을 속이려면 먼저 자신을 속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자신을 제대로 비춰보라는 것이니 생각할수록 오묘합니다. 내 안에는 진정 ‘수많은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안에 단 하나의 ‘나’만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나는 같으면서도 똑같지 않습니다. 불기자심(不欺自心), 그것은 나만의 삶을 사는 중생들에게 벼락을 내리친 것입니다.”

 

김 선생님은 “성철 큰스님께서 늘 얘기하신 ‘자기를 바로 봅시다, 남 몰래 남을 도웁시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도 진정한 이웃사랑이 무엇인지를 깨우치는 귀중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 선생님은 1년 계획으로 ‘성철 평전’을 연재하고 있다.

 

뛰어난 글 실력과 불교와 사회를 바라보는 남다른 안목으로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앞으로의 몇 개월이 인고의 시간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 다음 계획을 묻는 것이 어색했다. 그러나 김 선생님은 주저함이 없었다.

 

“이제 인물 얘기는 여기서 멈추고요, 식물을 주제로 한 장편동화를 쓰고 싶습니다. 지금 구상 중에 있습니다. 화엄(華嚴) 사상과 『금강경』에서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스스로의 다짐을 전해줬다. 앞으로의 성철 평전이 더 기대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제 나름대로 평전 집필의 원칙이 있습니다. 공정하게, 역사에 교훈이 되게, 소설처럼 재미있게 쓰자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던 분들의 삶을 제대로 기록하여 역사에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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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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