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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오래된 미래]
사띠의 의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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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스님  /  2017 년 6 월 [통권 제5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73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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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수행자들 중에는 ‘사띠’가 불교에 도입되어 불교수행의 본질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한 이후 그 어떤 변화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이런 믿음, 즉 사띠의 의미가 부처님 시대부터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정확한 번역어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이 오늘날 한국불교학계에서 이른바 ‘사띠 논쟁’을 낳은 배경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띠 개념이 지금까지 단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그것이 지칭하는 불교수행법 또한 다양하다. 심지어 오늘날 남아시아에서 실천되는 수행법들이 초기불교 수행법과 정확하게 일치하느냐에 대해서도 최근 비판적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정이 그렇다면, 모든 개념이 그렇듯이 사띠 개념은 니체가 말한 계보학은 아니더라도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며, 적어도 그 의미의 해석 및 수행법에서 강조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환기(apilāpana)’와 ‘붙잡고 있기(upagaņhana)’

 

그 변화의 양상은 비교적 초기 문헌으로 간주되는 『밀린다팡하(Milindapañha)』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밀린다왕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가세나는 사띠를 ‘환기(apilāpana)’와 ‘붙잡고 있기(upagaņhana)’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전륜성왕에게 아침 저녁으로 왕의 재산을 ‘환기하는(apilāpeti)’ 집사와 같이 사띠는 마음의 현상들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환기시켜 수행할 덕목을 알려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 나가세나에 따르면, 사띠의 두 번째 특징은 ‘붙잡고 있기’이다. 그것은 마음에 뭔가 담아둔다는 기초적인 의미뿐 아니라 수행에 도움이 되는 현상들을 따라가는 상태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나가세나는 이 개념을 통해 사띠를 단순한 주의 집중을 넘어서 수행에 도움이 되는 대상과 연결시킨다. 이 관점은 사띠를 사념처 수행과 수념(anussati)과 연관시켜 이해한 상좌부 주석서 『니데사(Niddesa)』에서도 발견되는데, ‘불, 법, 승, 보시, 지계, 천’ 등 여섯 가지 수념의 대상은 수행자가 늘 환기하여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것으로, 기본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전제하고 있다.

 

4~5세기 상좌부 주석서들에 나타나는 설명들에서 사띠는 “마음을 구성하는 특성들이 기억을 하는 수단, 마음 자체가 기억하거나 단순히 기억하는 작용”이란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사띠는 “떠돌아다니지 않음이 그 특징이고 잊어버리지 않음이 그 속성이며 인지의 대상을 지키거나 직면하고 있음을 통해 알려지며, 지속적 인식(thirasanna)이나 몸에 대한 염처 등이 그 기초이다. 그것이 인지의 대상 속에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기둥과 같고, 눈과 다른 감각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 수문장과 같다.(As 121-122; VismⅩⅣ 141)”

 

5세기 근본설일체유부 주석서 『아비달마등론(Abhidharmadipa)』에서 사띠는 “마음의 기능 중 하나로서 마음의 목적을 환기하는 것이며, 사띠는 무언가를 했든, 할 것이든 또는 하고 있는 것이든 어떤 한 행위도 놓치지 않는다.”고 설명되고 있다. 또한 같은 시기의 유식논사인 무착(Asanga) 역시 『아비달마집론(Abhidharmasammucaya)』에서 알아차림을 “익숙한 대상을 마음에서 놓치지 않는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분산되지 않는 것”이라 하면서 기억과 관련된 사띠의 작용에 주목했다.

 

하지만 사띠의 성격에 대한 판단은 부파에 따라 달랐다. 불교학의 발전에 따라 아비달마를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제법은 선법, 불선법, 무기법 등으로 분류되었는데, 사띠의 성격에 대해서는 각 부파에 따라 다른 분류체계를 보여준다. 사띠가 상좌부에서 선심소로 분류되었던 것과 달리 설일체유부에서는 경우에 따라 선할 수도, 불선할 수도 있는 것으로 분류되었다.

 

상좌부는 사띠를 탐욕·성냄·어리석음에 뿌리를 둔 의식과 연합된 것이 아니라 비집착과 친절에 뿌리를 둔 의식과 연합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선심소로 분류했다. 설일체유부에서 사띠는 변행심소로서 분류되었는데, 항상 마음에 현존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선할 수도 선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좌부와 설일체유부 모두 사띠를 인지 대상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의식의 능력으로 보았지만, 설일체유부에서는 모든 의식이 인지 대상을 ‘마음에 간직하기’가 전제되어야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띠는 변행심소로 분류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탐·진·치와 같은 불건전한 심소를 기억한다면 이때 사띠는 당연히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건전한 심소을 기억하는 ‘올바른 사띠(正念)’가 있듯이 불건전한 심소를 기억하는 ‘잘못된 사띠(mithyāsmrti, 邪念)’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띠의 스펙트럼

 

이 논쟁에서 유식학파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입장을 취했다. 유식학파는 사띠가 모든 의식에 존재한다는 설일체유부의 주장도, 사띠가 항상 그리고 오직 건전한 마음의 상태와 연합해 있다는 상좌부의 주장도 부정하면서 사띠를 특수한 상황에 한정된 마음의 특징으로 보았으며, 불건전하거나 건전한 마음 상태에 모두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논쟁은 “기억이 어떤 마음의 기능과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띠가 기억 행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사띠의 결과인가에 대해서는 부파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상좌부 논서 『수승의주(殊勝義註, Atthasalini)』에 따르면, 불건전한 마음의 상태에서도 과거의 행동을 기억하지만 그 기억은 불건전한 의식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사띠와 무관하다. 정리하면, 대부분의 기억이 사띠와 연합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상(想, samjna), 즉 개념적 동일시와 연합되어 일어난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반영하기보다 탐·진·치의 영향을 받아 마음이 만들어내는 개념들과 생각들에 불과하다는 것인데, 상좌부뿐 아니라 불교 아비달마 사상가 대부분이상(samjna)이 기억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유식논사인 세친 역시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인지하는지 설명하면서 기억을 기억의 대상에 대한 ‘개념적 동일시’에 따라 일어나는 의식의 특수한 사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그는 다른 아비달마 논사와 의견을 같이하고 있지만, 사띠의 대상이 현존하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것인가에 대하여 설일체유부와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설일체유부는 사띠를 인지 대상을 현재의 순간으로 ‘환기하며’(abhilapati) 그래서 그 대상들을 나중에 기억될 수 있는 조건들 중 하나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유식학에서 사띠는 과거에 파악한 의식의 대상을 ‘환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띠는 ‘익숙한 대상을 놓치지 않는 것’,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것’으로, 한번 대상이 마음에 알려지면 그 순간부터 사띠는 반복적으로 그것을 마음으로 ‘환기하며’ 마음이 다른 의식의 대상에 의해 산만해지는 것을 막는 작용을 한다.

 

세친의 사띠 해석이 과거의 대상과 연관된 것에는 중요한 근거가 있다. 그는 사띠를 이해(prajna)의 한 형식으로 보았는데, 경전들에서 염처 수행을 ‘관찰’(anupasyana)의 한 형식이라고 기술하고 있듯이 사띠는 사물의 여실함에 대한 관찰이나 통찰, 또는 이해의 형식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관찰을 할 때 사띠가 행하는 역할에 대한 세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띠는 마음에 현전하여 관찰된 것은 무엇이든 붙잡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 뒤에 이해가 작동할 수 있다. 둘째, 이해는 그 대상이 실제로 어떤지 관찰하며, 그때 사띠는 그것을 ‘환기하는(abhilapana)’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사띠는 이해를 통해 자신을 적용시킨다. 그러므로 사띠의 적용은 이해이다. 왜냐하면 [사띠는] 사물을 [이해를 통해] 본 그대로 환기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설명에 따르면 사띠는 단단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현재 의식의 대상을 붙드는 작용만 한다. 그런데 두 번째 설명에 따르면, 사띠는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것(abhilapati)”, 즉, 관찰해온 것을 그대로 환기하고, 기록하고, 지적하고, 기억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세친에게 사띠는 이해를 통해 우리가 본 것을 붙잡는 수단이고,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지각된 것을 마음에 간직하게 하는 수단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부파불교 시대에 불교교리가 체계화되면서 사띠 개념도 체계화되는 과정을 밟았다. 사띠의 의미가 현존하는 마음의 상태에 대한 주의뿐 아니라 불교에서 권장하는 기억 대상에 대한 기억으로 확장되면서 의식 전반에서 일어나는 심소인지 특정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심소인지에 대한 논쟁과 선심소인가 불선심소인가라는 논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논의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과정이었을 뿐 아니라 수행법에서도 대승불교 수행법으로, 나아가 선불교 수행으로 전환되는 거대한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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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스님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운문사 승가대학을 마치고 10년간 강사로서 학인을 지도했다. 경전 연찬을 하는 틈틈이 제방에서 정진했으며, 서울대와 동국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과 대안연구공동체 등에서 미학, 명상, 불교를 강의해오고 있다. 2016년 미르문화원을 열고 그곳에서 은유와마음연구소를 맡아 운영한다. 새로운 형식의 불교모임인 무빙템플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으며, 이 밖에도 (사)한국명상지도자협회 이사와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은유와 마음』, 『미술관에 간 붓다』,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등이 있으며, 「무지한 스승으로서의 선사」, 「『선문염송』의 글쓰기-정통과 민족적 정체성의 지향」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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