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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큰스님에 대한 믿음이 바로 시봉(侍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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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5 년 6 월 [통권 제2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8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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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 

 


 

 

매년 음력 3월 6일은 백련문도 불자들이 산청 겁외사에 모여 방생(放生)을 하는 날이다. 오로지 기도와 정진에만 힘을 쏟는 신도들에게 성철 스님은 당부했다. “정진도 좋지만 주변을 살피는 일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이웃을 보살피고 생명을 살리는 방생을 꼭 하라. 이웃을 살필 때는 꼭 그 사람이 모르게 하라.” 이 말씀에 따라 전국에 있는 신도들은 자체 모임을 만들어 보시(布施)는 물론 매월 음력 6일에 방생을 해왔고, 성철 스님 열반 후에는 문도회 차원에서 방생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지난 4월 24일(음력 3월 6일), 성철 스님 탄생 성지 겁외사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서울, 부산, 대구, 창원, 경기 등 전국에서 온 백련 불자들의 발걸음에 겁외사 마당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마당 정중앙의 성철 스님 입상(立像)에 참배하고 대웅전에 들러 다시 절을 올리고 형형색색의 등(燈)도 살펴본다. 그리고 모두 함께 사시예불을 올린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백련문도 불자들의 정진 열정은 이날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4월 24일 공식개관한 성철 스님 기념관 모습 

 

이날 겁외사에서는 방생과 함께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예불에 이어 대중들 모두가 성철스님기념관(이하기념관) 앞으로 자리를 옮긴다. 바로 기념관 불사 회향법회를 봉행하기 위해서다. 2,000명이 넘는 대중들은 기념관을 ‘포위’하고 각자 자리를 잡았다. 의자에 앉지 못하면 그냥 서서, 아니면 멀찍이 떨어져 앉아 역사의 현장에 동참했다. 

 

부산에서 온 한 불자는 “우리스님(원택 스님)이 왜 이리 바쁘셨는지를 이제야 알겠다. 이렇게 좋은 불사를 하시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며 손을 모았다.

 

기념관, 민족의 빛나는 문화유산을 이어받은 성지 

 

오래 전부터 기념관 불사를 진행해 온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 스님이 대중들 앞에 섰다. 

 

원택 스님은 문도스님들과 힘을 모아 1998년 가을에 성철 스님 사리탑 불사를 회향했고, 2001년 음력 3월 6일에는 겁외사를 창건했다. 또 2012년 3월 11일에는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서 ‘성철 대종사 탄신 100주년 기념법회’를 봉행했고 이어서 ‘성철 대종사의 일생과 조계종 50년’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불교중앙박물관에서 100일간 진행하기도 했다. 또 2013년에는 다양한 내용으로 성철 스님 열반 20주기 추모행사를 이끌기도 했다. 

 

“선양사업을 하면서 겁외사에 큰스님 기념관을 세워서 당신의 선(禪) 사상과 자비정신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불사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큰스님의 뜻을 담은 기념관을 어떻게 형상화해야 할지 큰 근심덩어리를 가지고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문득 평소 자주 말씀하시던 큰스님의 법문이 떠올랐습니다.

 


2000여 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념관 불사 회향법회 모습 

 

‘21세기 세계 인류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것은 선불교다.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이 부처다. 마음 이외에는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말라. 오직 자기 마음을 알고 마음을 깨쳐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만고의 철칙이다. 이 마음을 깨쳐 성불한다는 선불교만이 앞으로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할 것이다.’

 

이 말씀을 기념관에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궁리하는데, 최남선 선생이 『조선불교』에서 주장한 ‘인도의 불교는 서론적 불교이고, 중국의 불교는 각론적 불교이고, 우리나라의 불교는 결론적 불교이다. 『십문화쟁론』에서 회통불교를 내세운 원효 대사의 사상이 통불교이며, 통불교야말로 한국불교의 특색’이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파의 불보살님을 통섭하고 선불교를 지향하는 형식으로 기념관을 세울 것을 생각했습니다. 지나온 세월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옛 석굴 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기념관을 석굴형으로 건립하기로 하고 2013년 5월에 착공하여 오늘의 회향에 이르렀습니다.” 

 

원택 스님은 또 “기념관은 화엄신앙, 법화신앙, 미륵신앙, 정토신앙, 약사신앙, 관음신앙 등을 아우르면서 ‘우리 모두가 부처님’이라는 선불교와 선적 종교체험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출가 후 한 번도 고향 땅을 밟으신 적이 없는 큰스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오늘 큰스님 설법상을 생가가 있는 기념관에 모신 이유는 큰스님과 같은 수행자가 이 땅에 끊이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념관 성철 스님 설법상을 참배하고 있는 원택 스님 

 

회향법회에 동참한 동국대 홍윤식 명예교수는 기념관을 장엄한 토기문화에 주목했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토기문화는 신석기시대에 시작하여 가야, 삼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더욱 세련되고 다양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 배달민족의 전통문화인 도자기의 원류정신을 이어 받아 미륵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각 천불씩 모두 3000불을 황토색의 도자기로, 또 금동석가모니불을 청자감실로 조성해 재현한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한국 현대불교를 일으킨 용성, 동산, 성철 스님의 진영을 퇴옹전에 모시는 것으로 불사가 최종 마무리 되는 기념관은 앞으로 성철 스님의 사상과 자비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법회를 마친 불자들은 흡사 해인사에서의 사자후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성철 스님 설법상을 비롯한 기념관 곳곳을 참배한 뒤 서둘러 경호강으로 향했다. 성철 스님이 강조한 나눔과 회향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강 안쪽에 마련된 방생 공간에서 생명을 살리고 돌아오는 백련문도 불자들의 표정은 뿌듯했다.

 

등(燈)보다 철쭉?! 백련암의 5월

 

기념관 불사 회향법회가 끝난 뒤, 이번에는 백련암으로 향했다. 5월의 가야산은 초록의 중중무진(重重無盡) 세계 그 자체다. 해인사가 가까워질수록 세상을 밝혀주는 등(燈)의 숫자도 많아졌다. 

 

숲에 취해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백련암은 등이 아닌 철쭉 천지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보란 듯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큰스님께서 환갑을 지나시면서 꽃과 나무에 관심을 보이셨어요. 모란, 작약은 물론 철쭉도 좋아하셨습니다. 큰스님 열반하시기 몇 년 전에 철쭉을 심었는데, 덕분에 이제는 백련암을 참배하는 사람들 눈이 호강하고 있습니다. 하하.” 

 

원택 스님은 철쭉 사이사이의 텃밭에 심어진 고추와 가지 모종을 보면서 “처음 백련암에 왔을 때 일을 할 줄 몰라 큰 스님께 맨날 쥐어터지던 기억이 다시 난다.”며 웃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백련암에는 5월의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연등이 하나도 없다. 화려한 연등을 보다가 백련암에 오면 다소 실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스님은 출가 초기의 일화를 들려줬다. 

 

백련암 출가 후 첫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서 스님은 걱정 아닌 걱정이 앞섰다. 발을 동동거리며 뛰어다니느라 경황이 없는 중에 어떻게 초파일을 보내야할지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그런데 백련암은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와도 오히려 조용했다. 사정이 궁금해진 스님은 원주스님에게 물었다.

“백련암은 초파일 등을 준비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연등을 큰절에서 가져옵니까?” “그 행자 초파일이 되게 기다려지는 모양이네요. 여기는 암자인데 어떻게 큰절 등을 가져온다는 발상을 다 할 수 있소? 백련암은 초파일 등을 달지 않아요!”

 

원주스님의 날카로운 대답에 스님은 잠시 무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철 스님은 “내가 해인총림 방장인데, 백련암에 등을 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백련암에 초파일 등을 달고 싶다는 신도는 다 큰절로 내려 보내라.”고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물론 등을 다는 것보다 마음을 밝히는 일에 더 관심을 갖길 바라는 성철 스님의 숨은 뜻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해인사에 들렀다가 등을 달기 위해 백련암에 올라오는 불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부처님오신날에 대한 말씀을 듣던 중 성철 스님이 내렸던 법어 중 불자들이 한 번 더 읽었으면 하는 것을 추천해 달라고 원택 스님에게 요청했다. 성철 스님은 생전 주옥같은 한글법어를 내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글법어 역시 원택 스님의 건의에 의해 시작됐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소설가 최인호 선생은 ‘자기를 바로 봅시다’를 읽고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고 저한테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특히나 최 선생은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는 구절을 참 좋아한다고 했어요.

 

큰스님의 다른 법어들도 다 좋지만 저는 1986년 부처님오신날 법어인 ‘생신을 축하합니다’를 추천할까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법어를 통해 교도소 재소자, 노동자, 농민, 학생, 이웃 종교인은 물론 별, 꽃, 구름, 바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정(有情), 무정(無情)물들을 아울러서 일체중생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이 바로 부처님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화엄경』의 정신을 선(禪)적으로 표현한 법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택 스님은 찬찬히 ‘생신을 축하합니다’를 읊어 내려갔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 없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꽃밭에서 활짝 웃는 아름다운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 (중략) …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이라. 일체가 부처님이요,

부처님이 일체이니 모두가 평등하며 낱낱이 장엄합니다.

… (중략) …

 

자비의 미소를 항상 머금고 천둥보다 더 큰소리로 끊임없이 설법하시며 우주에 꽉 차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 나날이 좋을시고 당신네의 생신이니 영원에서 영원이 다하도록 서로 존경하며 서로 축하합시다.

 

시봉(侍奉), 효(孝)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개념

 

염화실(拈花室)은 성철 스님을 위해 마련했지만, 정작 성철 스님이 한 번도 머물지 못했다. 이곳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원택 스님은 ‘시봉’에 대해 말했다. 여기서 원택 스님이 이 시대 ‘시봉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식이 부모님 은혜를 생각할 때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이죠. 그런데 세속의 이 ‘효(孝)’ 개념으로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힘든 것이 바로 시봉(侍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절로 시봉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성철 스님과 원택 스님의 모습  

 

백련암으로 출가해 생전 20여 년, 열반 후 20 몇 년을 훌쩍 넘겨 모시다 보니 주변에서는 제가 잘해서 큰스님이 더 빛난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십니다. 그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정말 그분들의 기대와 바람대로 제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큰스님께는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대중들이 저에게 말씀해주시는 시봉은 큰스님에 대한 믿음의 소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큰스님의 위대함에 비하면 지금 하는 일은 보잘 것 없습니다. 앞으로 분골쇄신(粉骨碎身)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스님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추모사업들이 행여 은사스님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원택 스님은 출가와 함께 성철 스님 시봉을 시작했다. 일상생활에서 스승을 모시는 기본적인 일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성철 스님의 사상을 전하는 일도 계속했다. 또 스승이 계시지 않지만 생전 가르침이 끊임없이 펼쳐지도록 정진하고 있다. 

 


기념관 오른쪽 벽에 새겨진 성철 스님 오도송 앞에 선 원택 스님과 제자스님들 

 

“1980년 가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큰스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원고 한 뭉치를 주셨습니다. 『선문정로』의 초고였어요. 큰스님께서는 저에게 원고를 들고 순천 송광사 불일암에 가 법정 스님에게 윤문을 부탁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따라 저는 바랑에 원고를 담아 불일암으로 갔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봉을 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선문정로』와 『본지풍광』을 비롯한 성철 스님의 법어집, <선림고경총서> 발간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원택 스님은 <선림고경총서> 발간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는다. 

 

“‘인재 양성’을 말씀드렸다가 혼만 나고 다시 며칠이 지난 뒤 큰스님을 찾아뵙고 ‘사람 키우기는 큰스님 말씀과 같이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때를 기다리기로 하시고, 그러면 역대 조사스님들의 어록 중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맥락을 같이하는 책을 번역하면 큰스님의 울타리가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말씀드렸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은 방법이겠네’라고 하시면서 곧 책 목록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말씀이 없으셔서 제가 30권 정도의 목록을 작성해 큰스님께 드렸습니다. 한 일주일 쯤 뒤에 저를 부르시더니 몇 권은 빼고 몇 권은 추가해 주시며 ‘이 책들을 잘 번역해 보라’고 당부하시는데 그것이 <선림고경총서> 37권의 탄생 배경이 되었습니다. 1993년 7월에 <선림고경총서>를 완간하고 10월에 완간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진행했는데, 바로 한 달이 못되어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셔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원택 스님은 “돈오돈수 사상의 핵심이 되는 어록들을 번역해 책으로 낼 수 있었던 것을 그나마 큰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현재 불교계에서 이뤄지는 어른스님들에 대한 선양사업에 대해서도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조계종을 비롯해 우리 불교계에서는 학술대회나 문집발간 등 다양한 형태로 어른들을 기리는 작업들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훨씬 풍부해지고 있어 무척 반갑습니다. 

 

그런데 하나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스님만 최고’라는 인식입니다. 성철 큰스님 역시 자운, 청담, 향곡, 서옹 큰스님과 같은 도반들이 있었기에 후학들을 제접하고 당신의 사상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부의 모습을 보면 ‘다른 스님은 그저 그렇고 우리스님만 최고’라는 주장을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띕니다. 이런 것들은 다소 지양해야 할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 어른들이 계셨기에 오늘날의 조계종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상 선양 작업은 계속 진행 중

 

성철 스님의 사상을 선양하기 위한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백일법문』 개정증보판을 냈고, 성철 스님의 법어집을 쉽게 풀어쓴 책도 함께 세상에 내놨다. 

 

“2014년 11월에 3권으로 구성된 『백일법문』 개정증보판을 냈습니다. 1992년 처음 책을 만들 때 빠진 14개 테이프를 새롭게 발견해 보충했어요. 이 부분들에는 천태종·화엄종·법상종의 중도사상 내용이 더 상세히 들어 있습니다. 또 중국 선사들이 밝힌 중도의 뜻과 어록도 풍부하게 담겨 있습니다. 

 

특히 이번 책에서는 세상에 잘못 알려진 내용을 바로 잡은 것도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보조지눌 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일방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20대 젊은 시절의 지눌 스님 저술은 돈오점수이지만, 말년의 저서 『간화결의론』 등을 보면 돈오돈수 사상이 담겨 있어요. 큰스님께서는 이를 모르는 젊은 수좌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백일법문』은 성철 스님이 1967년 해인총림 방장으로 추대된 후 그 해 동안거에 100일 동안 불교의 핵심을 설한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성철 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해 불교의 핵심은 중도(中道)에 있음을 강조했다.

 

원택 스님은 “개정증보판 『백일법문』이 더욱 많은 분들에게 진리를 알려주는 ‘마르지 않는 법문’이 되고, 무명을 밝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4월에는 스님의 고희를 기념해 성철 스님 사상논집인 『아침바다 붉은 해 솟아 오르네』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성철 스님의 대표적 저작인 『백일법문』과 『선문정로』, 『본지풍광』을 전문 학자들의 연구를 빌려 대중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하도록 했다. 또 뉴욕 스토니브룩대 박성배 교수의 ‘돈오돈수설의 종교성에 대하여’와 중앙승가대 도서관장이자 서울 삼정사 주지인 원소 스님의 ‘곁에서 본 성철 스님’ 원고도 함께 실었다. 

 

『선문정로』(1981년 발간)와 『본지풍광』(1982년 발간)은 참선 수행의 방법과 근본원리를 다양한 경전과 어록을 인용해 제시하고 있는 책으로 성철 스님 스스로 “부처님께 밥값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저서들이다. 특히 성철 스님은 위 책들에서 돈오돈수를 본격적으로 명확하게 주창했다. 

 

원택 스님은 본인의 고희 기념집에서도 스승의 사상을 좀 더 쉽게 풀어보고자 한 것이다.

“제 맏상좌의 제안으로 고희집 출간을 고민하였고, 저를 위한 책보다는 성철 큰스님께 참회하는 마음으로 소납의 고희 참회집을 내어 놓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진리를 깨치는 일이 어찌 쉬울 수가 있겠습니까? 성실하고 박학한 학자님들의 붓끝을 빌어 큰스님의 사상과 가르침을 쉽게 풀어 놓았으니, 진리를 깨쳐 성불하고자 하는 부처님 제자들에게 어둠을 밝히는 훌륭한 횃불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와 함께 스님은 오는 6월말 회당조심 선사가 『종경록』의 핵심을 가려 뽑은 『명추회요(冥樞會要)』를 번역해 발간할 예정이다. 『종경록』은 영명연수 선사가 일심(一心)을 종지로 삼아 엮은 10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다. 『명추회요』는 성철 스님이 생전에 『선문정로』에서 일독을 권할 정도로 선의 핵심을 담고 있는 중요한 선서(禪書)이다. 

 

<선림고경총서> 37권과 법어집 11권 출간을 마치고 원택 스님은 다음에는 무슨 책을 발간하면 좋을지를 성철 스님에게 여쭈었다.

“그 책들을 내면서도 허겁지겁 분주를 떨었는데 뭐를 더 하겠나? 고만해라!”

 

“그러시면, 다른 것은 몰라도 큰스님께서는 『선문정로』 1장 ‘견성즉불(見性卽佛)’에서 영명연수 선사의 『종경록』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종경록』 100권은 종문의 지침으로 용수 이래의 최대 저술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임제 정전인 황룡혜남 선사의 상수제자인 회당조심 선사께서 연세가 많으심에도 ‘내가 이 책을 늦게 보게 된 것을 한(恨)한다’며 항상 『종경록』을 애중하게 여기셔서 수중에서 놓지 않고 중요한 것을 요약하여 3권으로 된 『명추회요』를 만들어 세상에 널리 유전케 하였다고 법문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종경록』100권은 너무 방대하니 후학들을 위해 『명추회요』를 번역했으면 합니다. 나중에는 『오등회원』도 번역해 보겠습니다.”

 

“영명연수 선사는 ‘중국의 석가모니’로 ‘소석가(小釋迦)’로 존숭 받는 스님이신데, 『명추회요』라도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으면 큰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책이 어려운데 누가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하지 말라.”는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허락’으로 알고 원택 스님은 『명추회요』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엄청난 산고(産苦) 끝에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큰스님께 말씀을 올린 후 23년이 지나 이제라도 출간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선(禪)과 교(敎)를 깊이 있게 연구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간(世間)을 능가하는 출세간(出世間)

 

원택 스님은 시봉 못지않게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다. 많은 불자와 시민들이 그러하듯 스님에게도 지금의 한국불교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시 추락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이 지금의 한국불교다. 특히나 최근에 있었던 해인총림 방장 추대 과정과 관련해서는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건강하시던 법전 큰스님께서 작년 12월 말에 갑자기 열반에 드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며 다음 방장스님은 어떤 분을 모셔야 할지에 대한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백련암 문도들은 방장은 선사(禪師)여야 하고, 허락된다면 용성 문중의 어른이기를 바랐으며, 또 방장스님을 모시는 형식은 선거가 아닌 추대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염원과는 다르게 선거로 방장을 선출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아쉬웠습니다. 그동안의 총림 전통대로 여법한 추대를 통해 방장스님을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해 산중대중들과 종도들에게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방장이 되신 원각 스님께서 대중들을 포용해 잘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스님은 조계종의 선거제도에 대해서는 더 큰 아쉬움을 표했다. 종단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선거제도라는 주장이다.

 

“많은 분들의 더 많은 의견이 있을 것입니다만 지금의 선거제도는 보이지 않게 조계종의 종지 종통을 더 없이 추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승려의 수행화가 되어도 모자란데 전 승려의 정치화로 치닫고 있으니 우리 모두의 처절한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교계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조계종 내외의 사부대중들이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를 뽑는 제도는 전 대중의 선거에 의한 투표가 아닌 율장의 ‘장로회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혁명적 발상이 필요합니다. ‘장로회의’를 신설하여 소임을 맡기고 모든 선거제도는 파기해야 조계종이 중흥의 터를 닦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제 조계종만의 ‘콘클라베’가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평생 스승을 시봉하며 정진해왔지만 종단과 사회를 보는 원택 스님의 눈은 날카로웠다. 평소 내전(內典)과 외전(外典)을 가리지 않고 탐독하는 것은 물론 신문과 잡지 등 각종 매체들을 꾸준하게 보면서 생긴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했기 때문에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흐트러짐 없이 계속해서 시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꽃들도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다시 밝은 얼굴로 가야산과 세상을 깨운다. 편하지 않은 다리지만, 원택 스님도 다시 뚜벅뚜벅 시봉의 한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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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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