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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수행하기 좋은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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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5 년 6 월 [통권 제2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674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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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기 좋은 장소는 한거정처

 

복잡한 도시에서 넘쳐나는 정보와 온갖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사는 현대인의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는 쏟아지는 정보와 사람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은 빛과 소리와 맛과 향기와 같은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六境]에 노출되면 자연히 스트레스를 받고 마음에는 번뇌가 들끓기 마련이다.

 

그런데 불교는 숲의 종교로 불린다. 인적이 드문 고요한 숲에서 사색하고 명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보고 듣는 것이 평화롭고 안정되면 감각이 순일해지고, 감각이 편안해지면 마음도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그래서 비록 수행을 모르고 화두에 몰입할 줄 몰라도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위치한 사찰에만 찾아가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법이다. 사람의 몸과 자연이 둘이 아니기에 평화로운 장소에 가면 몸도 안정되고 마음도 평화로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풍수지리를 따지고 명당자리를 찾는 이유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행은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복잡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본이다. 천태지자 대사의 수행지침서인 『마하지관』에는 수행을 위한 25가지 방편이 설명되고 있다. 그 중에 ‘구오연(具五緣)’ 장에는 수행을 위해 갖추어야 할 5가지 조건을 다루고 있는데, 수행 장소와 관련한 내용은 ‘한거정처(閑居靜處)’이다. 수행을 위해서는 한가롭고 고요한 장소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원효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발심수행장』에 따르면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깊은 골짜기는 수행자가 사는 곳[碧松深谷 行者所棲]”이라고 했다. 수행처에 대한 이런 전통은 불교가 등장하기 전에 성립된 우파니샤드 문헌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성철 스님도 장부경전에서 이런 맥락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즉, “모든 부처님께서는 숲속에서 고독하고 멀리 떨어진 처소를 좋아하여 적정하고 청한(淸閑)하여 선사삼매에 적합한 처소를 택하여 머무신 것”이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은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고요하고 한적한 숲을 좋아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철 스님은 “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될 수 있는 대로 분주함을 피해서 조용한 곳을 택해 선사삼매에 적합한 처소를 고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실제로 성철 스님은 몸소 그렇게 수행하신 분으로 유명하다. 스님은 팔공산 성전암에서 수행하실 때 암자 주변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했다. 해인사 방장과 종정이 된 이후에도 결코 절을 떠나지 않고 평생 그와 같은 수행처를 지켰다.

 

조용한 곳만 고집하면 고적병에 걸린다

 

그렇다면 수행을 하려면 이렇게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가 은둔적 생활을 해야만 되는 것일까? 만약 수행이 이와 같은 장소의 문제가 전제되어야 한다면 수행은 극히 소수의 영역이 되고 말 것이다.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고요한 장소로 찾아가거나 그런 장소를 직접 만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행자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수행할 토굴부터 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수행을 장소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만해 스님은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고요하게 가졌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처소를 고요하게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번뇌를 잠들게 하는 것이 수행의 요체인데 조용한 장소만을 고집하고, 마음이 육진 경계에 물들지 않는 것이 핵심인데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수행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만해 스님도 초심자에게는 조용한 수행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계에 휘둘리는 초심자의 경우이고 장소가 수행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도 수행에서 장소의 중요성을 언급했지만 수행을 위해 조용한 장소만을 고집한다면 ‘고적병(孤寂病)’에 걸린다는 경책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번뇌를 가라앉히고 삼매에 들 생각은 않고 좋은 장소만 찾아다닌다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삶이 분주해지고 새로운 번뇌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요한 장소만을 추구하는 고적병에 걸리면 수행은 커녕 오히려 사람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 스님의 말씀이다.

 

만해 스님이나 성철 스님이나 수행처에 대한 견해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선택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삼매에 들고, 번뇌를 잠재우기 위함이지 장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에는 일치하고 있다. 다행히도 불교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좋은 선방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그런 곳에 수행처가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수행장소가 좋다 할지라도 그곳에 발심한 수행자가 없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이 순일하고 삼매에 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삶을 번거롭게 하는 또 다른 번뇌일 뿐이다.


그래서 육조 스님은 수행한다고 조용히 앉아만 있는 수행자를 보면 몽둥이로 혼쭐을 냈다고 한다. 『육조단경』에는 “만약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과 같이 숲 속에서 좌선하고 있다가 도리어 유마의 꾸짖음을 당하리라.”고 했다. 조용한 장소를 고집하고, 앉아 있는 것만을 수행이라 한다면 사리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분주한 곳이 오히려 좋은 수행처

 

수행자가 좌선을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다. 따라서 좌선에만 집착하거나 조용한 장소만을 찾아다닌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좋은 약도 지나치면 병이 되는 법이다. 조용한 장소가 수행에 도움이 되지만 장소만을 고집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만이 수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수행 자체가 또 다른 집착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좌선하지 말라거나, 고요한 수행처를 일부러 피하라는 것은 아니다. 앉든지 서든지 마음을 다스리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 관건이다. 따라서 앉고 서는 데 집착하면 공부가 아니라 병이라는 것이 성철 스님의 지적이다. 옛 조사 스님들도 “고요한 처소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시끄러운 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효과가 백 천만 배는 더하다.”고 했다.

 

고요한 곳에서야 굳이 수행하지 않아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감각을 자극하고, 눈에 거슬리는 상황과 만나고, 감정적 충돌이 발생하는 곳에서는 매 순간순간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삶이 지탱될 수 없다. 진짜 수행이 필요한 곳은 역경계로 넘쳐나는 삶의 현장이다. 이런 이유로 만해 스님은 ‘진짜 크게 숨는 것은 저잣거리에 숨는 것’이라고 했고, ‘세속으로 들어가는 것[入世]이 곧 세속을 벗어나는 것[出世]’이라고 했다. 마음이 경계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면 비록 몸이 객진번뇌로 질퍽거리는 저잣거리에 있어도 그 마음은 자유와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평생 고요한 수행처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그런 곳만을 수행처로 고집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분주한 곳에서도 공부가 잘되면 고요하고 분주한 분별도 없어진다. 그 사람에게는 어느 곳이나 고요한 곳일 뿐”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쉬면 시장 가운데 있어도 산중과 같이 고요하고,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혼자 토굴을 파고 들어앉아 있더라도 마음을 쉬지 못하면 저잣거리 가운데 있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쉬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스님은 “참으로 고요한 곳은 마음을 쉬는데 있고, 발심(發心)에 있다.”고 했다. 마음을 쉬지 못하면 아무리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수행처를 마련한다고 할지라도 소용없다. 수행처는 공부에 도움은 되지만 그것이 공부를 시켜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중생의 삶이 고해를 떠다니고, 우리들의 몸이 복잡한 사회에 머물고 있다 할지라도 매 순간순간 마음이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면 그곳이 바로 수행처가 될 수 있다. 장소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가는 곳마다 수행처 아닌 곳이 없다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있는 곳마다 모두 한 가지[悟人在處一般]”라는 『육조단경』의 가르침도 이를 두고 하는 말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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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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