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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렸다고 해서 잘못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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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  2015 년 6 월 [통권 제26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27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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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조주(趙州)는 “뜰 앞의 잣나무”라 했고, 운문(雲門)은 “똥닦개”라 했다. 달리 말하면 ‘뜰 앞의 잣나무’일 수도 있고 ‘똥닦개’일 수도 있다는 것이며, ‘뜰 앞의 잣나무’여도 좋고 ‘똥닦개’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진리라고 해봐야 결국엔 망상일 뿐인데, 무어라 이름을 붙이든 그게 대수는 아닐 테니까. 

 

이렇듯 화두(話頭)는 잡다하고 번쇄한 생각을 ‘뭣도 아님’으로 수렴하는 말이다. 편 가르고 줄 세우기 좋아하는 알음알이의 길목을 막아서며 본연의 실상(實相)을 드러낸다. 물론 실상이라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단, 모든 것이 있는 척하지 않고 그냥 있는 상태다. 언어 이전의 세계에는 시비도 귀천도 없다. 

 


 

 

화두는 타파해야 한다지만, 음미만 하더라도 얼추 마음의 허기를 달랠 수 있다. 자신을 규정짓는 신분과 직함은 사실 ‘가짜 나’라는 것, 나를 향한 비난도 한낱 말일 뿐이니 연연할 이유가 없다는 것, 무엇보다 누가 뭐라건 간에 인생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는 것 등등. 수행의 궁극적 목표는 ‘말’에 현혹되거나 ‘말’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이다.

 

제15칙

앙산이 가래를 꽂다(仰山揷鍬, 앙산삽초)

 

위산영우(潙山靈祐)가 앙산혜적(仰山慧寂)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밭에서 옵니다.” 위산이 다시 물었다. “밭에는 몇 사람이나 있던가?” 앙산이 땅바닥에 가래를 꽂고는 합장하고 섰다. 이에 위산이 떠보았다. “남산에선 많은 사람들이 띠를 깎더구나.” 앙산은 가래를 뽑아들고 가버렸다.

 

앙산은 위산의 법을 이었다. 출가하면서 손가락 두 개를 자를 만큼 용맹하고 다부졌다. 스스로 부처이고 원래부터 부처이며 죽어도 부처라고 믿었던 대장부다. 점수(漸修)를 이야기하는 자는 크게 꾸짖거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스승의 물음은 제자의 확신에 흠집을 입히려는 수작으로 풀이된다. 싸움의 결과는 아랫사람의 완승이었다. 

 

밭은 ‘마음 밭’을 뜻한다. 땅에서 만물이 생장하듯이, 마음에서 일체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비유한 심전(心田)이다. 그리고 심전은 공(空)해야 한다. 메마르고 황량하며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 마음 밭이 최고의 마음 밭이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의 숫자를 묻는 질문은, 마음에 거치적거리는 게 있는지를 캐기 위한 점검이다. 이에 앙산은 ‘삽초’로써 자신의 무념(無念)이 얼마나 강견한지를 고했다. ‘그 입 닥치라’는 말의 육화(肉化)이기도 하다. 합장은 사실, 주먹감자다. 

 

패배가 무척이나 아쉬웠는지, 위산은 게임이 끝났음에도 한 번 더 태클을 걸었다. ‘띠’는 무덤가에 나는 잡초이며, 본칙(本則)의 평창(評唱)에는 “띠를 깎는 것은 신하와 아들 쪽의 일”이라고 적혔다. 나는 어중이떠중이의 일상으로 읽었다. 곧 위산은 ‘끼리끼리 모여 이익을 가르고 수다나 떠는 삶’의 보편성을 들이밀며 앙산의 타락을 유혹하고 있는 셈이다.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던 앙산의 선택은 도망이었다.

어차피 우승컵은 그의 몫이다.

 

제16칙

마곡이 지팡이를 흔들다(麻谷振錫, 마곡진석)

 

마곡보철(麻谷寶徹)이 장경회휘(章敬懷暉)에게 갔다. 승상(繩狀)을 세 바퀴 돈 뒤에, 들고 있던 석장(錫杖)을 한 번 굴려 세우고는 우뚝 섰다. 이에 장경은 “옳다, 옳다” 하였다. 이후 남전보원(南泉普願)에게 가서 똑같은 ‘쇼’를 보여줬는데, 남전은 “틀렸다, 틀렸다” 하였다. 마곡이 남전에게 따졌다. “장경 스님은 옳다 했는데 왜 스님은 틀렸다 하십니까?” “장경은 옳지만 그대는 옳지 않다. 바람의 힘으로 움직인 것은 끝내 무너지고 만다.”

 

‘승상’은 옛 스님들이 앉거나 누웠던 노끈 방석을 가리킨다. ‘석장’은 긴 막대기 끝에 쇠고리를 건 지팡이. 지장보살의 석장엔 여섯 개의 쇠고리가 달려서 육환장(六環杖)이다. 마곡의 행위는 ‘삼계(三界)가 일심(一心)에서 나온다’는 불교의 이론을 몸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해석된다. 세상만사가 마음놀음이고,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충분히 온당한 메시지이고 그러니 장경은 옳다고 해줬다. 이에 반해 남전은 동일한 몸놀림에 어깃장을 놓았다. 다만 나름의 해명을 대며, 자신의 딴죽엔 악감정이 실리지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바람’은 인연을 의미하며,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은 인연이 다 하면 반드시 사라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장경의 칭찬이란 ‘바람’에 들뜬 마곡은, 바람에 얽매여 ‘자랑질’에 나섰고 기어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임팩트를 반감시켰다. 

 

선사들은 ‘재탕’을 극도로 싫어한다. 앞선 생각에 집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于念而不念]’ 인간을, 가장 행복한 인간으로 쳐줬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마곡 역시 그다지 상심할 필요가 없다. ‘틀림’이란, 생각 한번 고쳐먹으면 사라질 흔적에 지나지 않으며, 엄밀히 이야기하면 남전의 ‘틀림’이지 마곡의 ‘틀림’은 아닌 덕분이다. 과거는 훌훌 털고, 남이 지은 업은 남이 받도록 놔두고, 표표히 제 갈 길을 가면 그만이다.

 

바람은 숲을 흔든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흔들렸다고 해서 잘못한 것은 아니다. 다, 괜찮다. 생각이 잠깐 있었을 뿐, 본래는 아무 것도 없다. 바람에 대한 노여움도 바람맞는 일의 아쉬움도 바람난 마음의 그리움도, 끝내는 바람보다 가볍다.

 

제17칙

법안의 털끝(法眼毫釐, 법안호리)

 

법   안 : 털끝만치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멀어진다고 했다. 그대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산주 : 웬걸요. 털끝만치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 사이보다 더 크게 벌어집니다.

법   안 : 그래서 또 어떻게 되겠는가?

수산주 : 저는 여기까지인데 화상께서는 어쩌시렵니까?

법   안 : 아무렴. 털끝만치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 사이보다도 훨씬 더 크게 벌어진다.

이에 수산주는 문득 절을 하였다.

 

‘언어는 생각의 그릇’이라 해서 얼핏 생각이 먼저인 듯하지만, 사실 장담하기 어려운 문제다. 예컨대 “나는 저 녀석이 싫어!”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조립돼야만, 비로소 저 녀석이 확실히 싫어지는 것이다. 아울러 사과가 ‘사과’임을 인지해야 거기서부터 먹고 싶어지며, ‘살인’이란 글자는 가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무섭다. 언어는 생각을 부추기고 생각은 언어로 강해지는 셈이다. 언어와 생각의 선후관계는 아리송하지만, 담합관계인 것만은 분명하다. 

 

개구즉착(開口卽錯). ‘말하는 순간 틀린 말이 된다’는 뜻이다. 언어의 숙명은 분할이어서, ‘이것’을 말하는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갈라져 나오고 만다. ‘부처’라는 개념 때문에 ‘중생’이란 자조(自嘲) 혹은 하대(下待)가 성립한다는 전제에서, 조사선은 ‘본래부처’라는 절대적 평등을 이야기한다. 특히 이것에 해박하다는 건, 자동적으로 이것 아닌 것에 무지하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모르니까 외면하고 차별한다. 입을 열면 먼지가 들어오게 마련이다. 모든 생각은 필연적으로 자기만의 생각이다. 

 

한걸음 나아가 선사들은 동념즉괴(動念卽乖)도 가르쳤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어그러진다’는 의미다. ‘바름’이라는 소신은 ‘삿됨’보다 더 악랄한 삿됨으로 변질되기 일쑤다. “불교는 불교가 아니며 단지 이름이 불교일 뿐”이라는 『금강경』의 논법은, 응당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는 지식의 한계를 일깨우기 위한 조치다. 진짜 평화는 한 사람이라도 섣불리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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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웅연
집필노동자.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조사선(祖師禪)에 관한 수업을 몇 개 들으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002년부터 불교계에서 일하고 있다. ‘불교신문 장영섭 기자’가 그다. 본명과 필명으로 『길 위의 절(2009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불행하라 오로지 달마처럼』, 『눈부시지만, 가짜』, 『공부하지 마라-선사들의 공부법』, 『떠나면 그만인데』, 『그냥, 살라』 등의 책을 냈다. 최근작은 『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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