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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명추회요(冥樞會要)』 해제를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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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5 년 7 월 [통권 제27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122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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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 “5월 초에 『명추회요』의 번역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감개무량함 속에서 한참 멍한 기분이었습니다. 자그마치 23년의 세월이 걸린 일이기에 무겁게 짊어진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그 홀가분함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고 첫 심정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달이 지난 6월 12일 오후쯤에 교정별쇄본이 고심정사에 있던 저에게 도착했습니다. 반갑고 기쁜 마음에 교정본을 받아들었는데 임시 편집된 교정본이라 920쪽이나 되는 부피에 주눅 들면서 차근차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첫날 저녁 밤에는 150여 쪽을 보았고, 13일 토요일에는 300쪽을 종일 보았고, 14일 일요일에도 늦게까지 300쪽을 보고 월요일에 나머지 170쪽을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틀린 글자는 한 자도 없었고 주 표시나 주 설명의 오자를 몇 개 발견하는 등 교정표를 만들어 선연출판사로 팩스를 보내며 번역한 스님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명추회요』는 여백을 줄이는 등 편집을 새롭게 한 결과 총 784쪽의 무게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경덕전등록』에서의 영명 선사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봅니다.

 

선사는 여항(餘杭) 사람이니 성은 왕(王)씨였으며 젊었을 때부터 불법에 마음을 두더니 20세가 되어서는 누린내 나는 것을 먹지 않고 하루에 한 끼만을 먹으며 『법화경』을 읽는데 일곱 줄을 동시에 읽어서 60일 만에 다 외우니 염소들이 꿇어 앉아 들었다고 합니다. 28세에 화정(華亭)의 진장(鎭將)이 되었는데 마침 영명취암(永明翠岩) 대사가 용책사(龍冊寺)로 옮겨 오니 취암 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대중을 시봉하기에 힘쓰고 몸을 돌보지 않고 그저 들 채소와 베옷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천태산 천주봉(天柱峰)에서 90일 동안 선정을 익히는데 척알이라는 새가 선사의 옷자락 속에다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합니다. 

 

천태덕소(天台德韶, 891~972) 국사를 뵙고 수기를 받아 명주(明州)의 설두산에 사니 대중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정진하였습니다. 건륭 원년(930년)에 충의왕이 영은산의 새 절에 들어와 살라하여 제1세 주지가 되었고, 이듬해에 다시 영명 대도량에 살라고 청하여 제2세 주지가 되어 대중이 2천 명을 넘었습니다.

대사가 영명도량에 주석한 지 15년 동안에 제자들 1500여명을 제도하였고, 『종경록』 100권과 시, 게송, 부(賦), 영(詠) 등 천만마디를 저술하여 해외까지 그 명성이 퍼졌습니다. 특히 고려의 왕이 대사의 설법을 전해 듣고 사신을 보내 제자의 예를 올리고, 금실로 짠 가사와 자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금으로 만든 차관 등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고려의 승려 36명이 직접 수기를 받아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본국으로 돌아가 제각기 한 지방을 교화하였습니다. 개보(開寶) 8년(975년), 12월 26일 진시에 향을 피우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입멸하시니 세수는 72세요 법랍은 42세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박인석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의 『명추회요』 해제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종경록』의 저자인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선사의 소개입니다. 

 

선사는 당(唐) 말에 전당(錢塘, 항주)에서 태어나 법안종(法眼宗)의 3조(三祖)로서 오대(五代) 시기에 주로 활동했고 북송(北宋) 초에 입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영명 선사에 대한 평가와 관점은 북송시기 이후로 조금씩 변동이 있습니다. 영명 선사가 입적하고 얼마 뒤에 간행된 『송고승전(宋高僧傳)』(988년)과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004) 등에서 영명 스님은 선사(禪師)로서의 면모가 강조되지만, 후대로 갈수록 정토종(淨土宗) 조사로서의 면모 및 그에 따른 신비한 얘기들이 덧붙여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후대로 갈수록 영명 스님은 법안문익(法眼文益)-천태덕소(天台德韶)로부터 이어져 오는 법안종 3조로서의 선사(禪師)의 지위와 더불어 정토종(淨土宗) 6조로서의 위상까지 얻습니다. 이는 앞서 살펴본 영명 선사와 가까운 100년 이내에 지어진 자료에서는 정토종과 관계되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선사가 입적하신지 330년 후에 지어진 원대(元代)의 『여산연종보감(廬山蓮宗寶鑑)』(1305)에서 정토종 계통의 책에서 두드러지게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명 스님에게 있어서 정토는 서쪽으로 10만 8천리 떨어져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유심정토(有心淨土)이며, 염불 역시 마음 밖의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영명 스님이 비록 정토를 언급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사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박인석 교수에게 『명추회요(冥樞會要)』의 해제를 부탁하였더니 “먼저 백련암에 가서 큰스님께서 쓰시던 장경각의 서책들을 보고 싶다.”고 하여 한달 전쯤 토요일 오전 10시쯤 백련암에 도착하여 오후 5시쯤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다음은 ‘해제문’의 요약 내용입니다.

 

이번에 번역된 『명추회요』와 그것의 근간이 되는 『종경록』에 대한 성철 스님의 관심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선문정로』에 잘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현재 해인사 백련암에 소장된 5질의 『종경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5질의 『종경록』은 크게 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2질은 해인사 장경각에 소장되어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경록』의 목판본 및 그것을 저본으로 삼아 활자화한 <대정신수대장경> 48권에 수록된 『종경록』이다. 이 중 목판본은 실물 크기 그대로 인출되어 있다. 다음으로 나머지 3질은 18세기 중국에서 찍어낸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에 포함된 것으로 3질 가운데 2질은 목판 인쇄본이고, 1질은 그것을 붓으로 필사한 것이다.

 

특히 이 <가흥대장경> 본 『종경록』은 김병용 거사가 성철 스님에게 기증한 도서에 들어 있던 것으로, 이 책이 조선에 수입된 이후 『종경록』의 목판본뿐 아니라 필사본까지 유통되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두 계통의 판본을 비교해 보면, 『종경록』 자체의 내용은 변동이 없지만, 「표종장」과 「문답장」의 위치가 교정되어 있는 점, <가흥대장경> 본에 청의 황제였던 옹정(擁正, 1678~1735)이 쓴 서문이 덧붙여 있는 점 등의 차이가 있다.

 

성철 스님은 『선문정로』에서 『종경록』을 인용할 때 권수를 일일이 다 표시하였는데, 그 중 권1의 「표종장」 부분에서 문구를 인용할 때는 ‘標宗章’이라는 표시를 반드시 부가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선문정로』에 나타난 『종경록』 「표종장」의 인용을 살펴보면, 그것이 옹정황제의 서문이 있는 『종경록』 판본의 체제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철 스님이 『선문정로』를 저술함에 있어 『종경록』의 촬요본이 아닌 『종경록』 100권 전체를 열람해서 필요한 부분을 인용했다는 점, 그리고 『종경록』의 전체 구성에 있어서는 『종경록』 1권의 전반부를 「표종장」으로 보는 명대 이후 판본의 관점을 따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화들짝 놀랐습니다. 큰스님께서 『선문정로』에서 밝히고 있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논쟁의 출발점을 『종경록』 「표종장」으로 삼고 계신다는데 새삼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선교합일을 주장한 스님으로 규봉종밀 스님과 영명연수 선사를 들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규봉종밀 스님의 선교관을 점수로 혹평하며 따라서 그 논리를 따르는 보조국사를 비판하고 계십니다. 

 

지금 한국불교계에서는 선학적으로나 교학적으로 영명연수 선사를 연구한 학자는 아직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그러면 『종경록』의 연구는 성철 스님 사상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명추회요(冥樞會要)』 의 번역으로 서명원 박사의 ‘『선문정로』에 나타난 선종의 전통에 대한 인식’이라는 논문을 다시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는 서명원 박사의 저서 p.44 ‘그림 4’의 ‘『선문정로』의 인용문 중 선종이 차지하는 비중’의 도표에서 오가칠종(五家七宗) 중 법안종이 17.5%로 가장 많이 인용된 것으로 표시됩니다. 이것은 성철 스님이 법안종의 제3조이자 마지막 조사인 영명연수 선사의 『종경록』을 매우 아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은 책 p.46 ‘그림 5’의 ‘『선문정로』에 가장 많이 인용된 저자 6명’ 가운데서도 영명연수 선사가 23.5%로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는 영명 선사의 『종경록』이 고려 광종(光宗, 925~975)대에까지 전해져 법안종의 선풍은 중국보다 고려에서 더 성행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고려 이후로는 영명연수나 『종경록』에 대한 관심은 더 이상 크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의 불교계에서 『종경록』과 그것의 촬요본인 『명추회요(冥樞會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성철 스님의 『선문정로』에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명추회요(冥樞會要)』의 출간으로 『종경록』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선종사에서 성철 큰스님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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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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