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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어디서도 만나지 못했던 성철 큰스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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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5 년 8 월 [통권 제28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8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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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연등국제선원 주지 혜달 스님




 

비바람이 지나간 뒤였지만 산야(山野)는 더 싱그러웠다.

곧 몰려올 염천(炎天)의 더위를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 

 

물살이 거세 배를 타는 것도 쉽지 않았다던 강화도는 이제 ‘섬 같지 않은 섬’이 되었다. 순식간에 다리를 건너면 도착하는 곳이 되다보니 강화도는 이름에서만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섬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강화도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겠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도심을 벗어나 강화도에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이 먼저 반겨준다. 섬 안으로 좀 더 들어오니 이번에는 짙푸른 신록이다.

그늘 사이로 난 조그만 오솔길을 달려 연등국제선원에 도착했다. 대웅전에서 사시예불을 올리는 스님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몸과 마음을 쉴 겸 예불에 동참했다. 

 


혜달 스님은 매일 성철 스님과 원명 스님 진영에 참배한다 

 

하안거 정진을 위해 몇몇 스님들이 선방으로 떠난 탓에 대중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예불은 여법(如法)했다. 대웅전 한편에 모셔진 성철 스님과 원명 스님의 진영에 삼배를 올리는 것으로 1시간여의 예불은 마무리됐다.

 

해외포교의 선구자, 원명(圓明) 스님

 

연등국제선원은 계룡산 무상사와 함께 외국인 스님들이 살며 수행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무상사가 숭산 스님의 제자들이 주석하는 사찰이라면 연등국제선원은 원명 스님 후학들의 보금자리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원명 스님은 성철 스님의 제자다. 선방에만 다녔을 것 같은 성철 스님 제자들 중 해외포교에 진력했던 스님이 바로 원명 스님이다. 원명 스님의 행장을 다시 짚어 본다. 

 

원명 스님은 1950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재학 시절 불교학생회 회장을 맡고 있던 절친한 친구의 영향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스님은 학생회 모임뿐만 아니라 절에서 열리는 법회에도 열심히 참석했다. 밀양 표충사에서 열린 수련회에 참석하고 난 스님은 더욱 불심(佛心)이 타오르기 시작해 집에서 식사를 할 때도 발우공양을 할 정도였다. 

 

스님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표충사를 다시 찾았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학생, 그 공부는 해서 뭐할 건가?” 하고 묻는 소리에 문득 출가할 결심을 굳힌다. 스님은 표충사 스님의 안내로 당시 해인총림 방장으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던 성철 스님을 찾아가 행자생활을 시작하며 산문에 들었다. 성철 스님이 해인총림 방장으로 와 백련암에 주석하면서 받은 행자 1호가 바로 원명 스님이었다. 성철 스님으로부터 ‘원명(圓明)’이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경전과 어록을 더 공부하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새겨듣지 않고 참선해서 하루빨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려는 마음에 선방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선방에서 생활을 해 본 스님은 기초가 단단해야 함을 깨닫고 백련암으로 다시 가 경전공부를 한 뒤 해인사, 봉암사, 상원사 등 전국 선원에서 12안거를 성만했다. 

 


해외포교 선구자 중의 한 분인 원명 스님 

 

김천 수도암 선원에서 정진하던 원명 스님은 화두가 잡히지 않고 자꾸만 영어단어가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서울에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스리랑카 스님과 인연을 맺어 1982년 유학길에 오른다. 스리랑카에서 정진하며 영어공부를 하던 스님은 영국 출신의 비구니 무진 스님을 만나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그 인연으로 스님은 무진 스님에게 한국불교를 전했고, 한국불교에 매료된 무진 스님은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힘을 쏟기도 했다. 

 

1985년 가을 귀국한 스님은 국제포교를 결심하고 성철 스님을 찾았다. 늘 참선수행을 강조했던 터라 행여 꾸지람이라도 들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성철 스님은 “중요한 일이니 가서 열심히 하거라.”며 격려했다. 

 

원명 스님은 이후 해외포교에 매진해 싱가포르 연화원, 인도네시아 해인사 포교원, 모스크바 달마사, 우즈베키스탄 정각사, 우크라이나 불심사, 키르키즈스탄 보리사, 방글라데시 원명사 등을 창건하는 등 다양한 해외포교 활동을 펼쳤다. 

 


백련암에서 성철 스님을 모시고 자리를 함께 한 원명 스님(뒷줄 가운데) 

 

건강을 돌보지 않으며 해외포교에 매진하던 원명 스님은 수십 권의 여권만을 남겨 놓고 2003년 9월 23일 해인사 청량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세수 53세, 법랍 33세. 

 

원명 스님은 비교적 일찍 세연(世緣)을 다했으나, 많은 제자들을 남겼다. 환속한 제자들까지 포함해 다양한 국적의 제자 20여 명을 두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외국인 스님

 

원명 스님의 뒤를 이어 연등국제선원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인도 출신의 혜달 스님(인도 이름은 Antim Priya Dewan)이다. 2012년 9월부터 주지로서 대중들을 외호하고 있다. 성철 스님의 직계 제자들을 좀 더 만나고 싶었지만 대부분이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다 보니 인터뷰 자체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손상좌이지만 현장에서 대중포교에 나서고 있는 혜달 스님을 찾았다. 

 

사실 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혼란스러웠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철저한 현지화(?)’라고 해야 할까? 스님을 뵙고 인도에서 온 스님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외모도 한국인 같고, 말씀도 한국인보다 더 유창하게 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만의 ‘넉살’과 과도한(?) 붙임성도 인도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2013년 10월 1일 원명 스님 10주기를 맞아 부도를 참배하고 있는 문도스님들 

 

예전에 스님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세수(世壽)가 어떻게 되세요?” “소띠요.” 이런 식이다. 한국인도 잘 모르는 ‘소띠’를 자신의 나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서울과 강화도를 오가며 몇 번 인사를 드리고 나서야 혜달 스님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예불을 마치고 공양실로 가다 스님은 밭에 들어가 고추와 상추를 땄다. 그리고는 깨끗하게 씻어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덕분에 풍족한 공양을 했다. 공양을 마치고 포행을 하던 중 스님은 밭을 가리키며 “감자, 고구마, 가지, 땅콩, 콩, 토란, 오이, 호박, 옥수수, 고추, 상추 등등이 여기서 나옵니다. 저 부자지요?”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연등국제선원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 설명했다.

“은사스님께서 1987년 9월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연등국제불교회관을 창건하셨습니다. 거기서 외국인을 위한 불교 기초교리 강좌, 영어로 불교경전 공부하기, 참선강좌, 한국문화 배우기 등의 강좌를 마련해 국내 외국인 포교를 시작하셨지요. 그러다 1994년 현재의 부지를 매입하고 불사를 추진하셔서 1997년 9월 현 위치에 연등국제선원을 개원하셨습니다.

 


경내에서 대중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혜달 스님 

 

현재 연등국제선원은 총 4,000여 평의 규모에 대웅전, 스님선방인 서래선원, 재가선방인 고경선원, 공양실과 템플스테이 숙소가 있는 연화당, 도서관이 있는 반야당, 스님들의 요사채인 정진당이 들어서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은사스님 부도탑 주변 정비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혜달 스님은 불사와 함께 한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포교에도 열심이다. 3박4일간의 참선집중수행과 넷째 주 주말의 아비라기도, 첫째 주 일요일의 가족법회, 초하루법회를 매월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참여하는 불자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또한 국・내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템플스테이도 꾸준하게 진행하고 있다.

 

“어떻게 소문이 나 있는지 외국인들은 ‘알아서’ 옵니다. 유럽이나 동남아, 미국 등 오는 지역도 다양합니다. 공항이 가까이 있는 것도 장점이 되는 것 같고요. 다음 주에도 스웨덴에서 일가족 4명이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연등국제선원 대웅전 

 

스님은 “연등국제선원이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절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누구라도 와서 부담 없이 지내다 가는 곳이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전법(傳法)도량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는 뜻도 나타냈다.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전하는 도량을 만들고 싶어요. 특히 선원의 기능을 되살려 많은 사부대중이 같이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녹록지 않은 현실이지만 옛 명성을 되찾고자 하는 스님의 의지는 다부졌다. 연등국제선원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뒤, 원명 스님과는 어떻게 인연이 됐는지에 대해 듣기 시작했다.

 

“너는 떠나면 안 된다”

 

사실 한국으로 오기 전 스님은 인도에서도 스님이었다.

18살에 출가했다.

“제 고향은 인도의 아루나찰브라데스입니다. 미얀마, 중국, 부탄, 인도의 접경지역이에요. 인도 북동부 끝자락에 있습니다. 인도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이기도 합니다. 

 


연등국제선원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붓글씨 사경을 하고 있는 모습 

 

이 지역에 사는 종족이 차크마(chakma)족인데 석가족의 후예입니다. 100만 정도의 차크마족 대부분이 불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할아버지도 스님이셨어요. 그래서 저도 그냥 자연스럽게 출가를 했습니다. 제가 스님 신분으로 콜카타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거기에서 조계종 어산어장 동주 스님을 비롯한 한국 스님들과 신도님들을 만났습니다. 외국 유학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한국 분들의 도움으로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스님은 2000년 6월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서울 홍은사에 머물렀다. 동주 스님의 주석사찰이다. 홍은사에 있으면서 한국어는 물론 한국불교의식을 배웠다. 언어와 의식 모두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그러다 나중에 사형이 된 일보 스님(방글라데시 출신)을 만났다. 일보 스님은 종로구 소격동 연등국제회관에서 원명 스님의 포교를 돕고 있었다. 결국 일보 스님의 추천으로 원명 스님을 친견하게 됐다. 

 


연등국제선원 법회에서 법문하고 있는 혜달 스님 

 

“제가 한국에 온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 은사스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한국어로 말씀을 드리니까 스님께서 조금 놀라셨던 것 같습니다. 한국어가 능숙하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처음 뵈었을 때는 별 말씀이 없으셨는데 나중에 다시 홍은사에서 인사를 드리고 나서 상좌로 받아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일보 스님이 ‘강력하게’ 추천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스님은 다시 한국스님이 되어 2001년에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혜달(慧達). 스님은 “법명이 엄청나다.”고 했다. “지혜에 통달한다는 뜻이니 은사스님 당부대로 열심히 살아야죠.” 

 

스님은 계를 받고 1년 정도 강화도 연등국제선원에서 정진했다. 그러다 부산 해운정사에 방부를 들였다. 유일한 외국인이자 사미승이었다. 그 다음 철에 제주 남국선원에 방부를 들이려 했지만 원명 스님이 붙잡았다. “너는 인도어와 영어, 한국어가 다 가능하니 나를 따라서 같이 해외포교를 하자.” 원명 스님의 당부에 따라 인도네시아 해인사를 맡았다. 기도를 하면서 한 달 정도 있었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원명 스님이 많이 아프다는 전갈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5개월여 간 스님은 원명 스님 바로 옆에서 시봉했다. 

 


연등국제선원 아비라기도 모습 

 

“은사스님께서는 당신이 건강하다고만 생각하시고 몸을 돌보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급히 귀국해 열반하실 때까지 옆에 있었습니다. 언젠가 스님께서 저에게 ‘너는 떠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경황이 없었지만 문중 어른스님들의 도움으로 스승의 영결식과 다비식을 치렀다. 짧았지만 너무나 강렬했던 인연이었다. 

 

원명 스님은 상좌들에게 항상 화합할 것과 하심(下心)을 당부했다. “국적도 다르고 살아온 문화도 달랐기 때문에 더 화합을 강조한 것 같다.”고 혜달 스님은 말했다. 스님은 또 “은사스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자비롭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고 밝혔다. 

 

원명 스님은 생전에 상좌는 물론 대중들에게도 항상 근검절약할 것을 주문했다.

“저의 은사이신 성철 큰스님은 흐르는 시냇물도 아껴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둬도 흘러가버리는 시냇물이지만 그런 물도 아껴 쓰라는 것이지요. 또 저의 행자시절, 해인사에서 누비옷 한 벌로 평생을 사신 지월 노스님은 쌀을 씻다가 겨가 나오면 그 껍질을 까서 밥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의 40%가 음식물 쓰레기라고 하는 요즘 새삼 큰스님들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고급 사치품을 사는 즐거움보다 조그만 것이라도 절약하고 아껴서 이웃과 함께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는 불자가 됩시다.”

 

잊을 수 없는 『백일법문』의 감동

 

이야기를 들으면서 궁금해졌다. 원명 스님은 제자들에게 성철 스님을 어떤 스승이라고 얘기했을까?

“참선 정진을 최우선시 했지만 대중화합도 강조하셨다고 들었어요. 공부하는 사람들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많이 아껴 주셨다고 합니다. 저도 큰스님 생전에 인사를 드렸으면 사랑을 좀 받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하.” 

 

혜달 스님이 성철 스님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백일법문』을 통해서였다. 연등국제선원에 있을 때 『백일법문』 상권을 영역(英譯)한 『Sermon of One Hunred Days-part one』을 접했다. 성철 스님의 법문집이라는 얘기에 저절로 책이 손에 잡혔다.

 

“큰스님께서 불교의 핵심을 중도로 엮어 초기불교부터 설명을 하시고 계시는데 정말 놀라웠습니다. 어디에서도 큰스님의 말씀과 같은 내용을 보지 못했었거든요. 시간이 날 때마다 몇 번이고 『Sermon of One Hunred Days-part one』을 읽었습니다. 나중에 한글로 된 『백일법문』 전체를 보면서 많은 공부가 됐습니다. 또 『가야산의 메아리(Echoes from Mt. Kaya)』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열반에 든 스승을 대신해 원택 스님을 은사로 2005년 구족계를 받은 스님은 이후 대구 동화사, 의정부 망월사, 보은 법주사, 의성 고운사, 순천 송광사 등 제방에서 정진하기도 했다.

 

“동화사에서 지금 조계종 종정이신 진제 스님께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부모에게서 몸 받기 전 본래 나의 면목은 무엇인가?’ 화두를 받았습니다. 화두를 받고 본격적으로 참구를 시작했습니다. 망월사도 산 기운이 저와 잘 맞았던 기억입니다.

한국 사찰에서 생활을 하면서 저는 ‘대중생활’이라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혼자가 아닌 선후배 도반들과 같이 살면서 여법하게 정진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은 틈틈이 성철 스님의 법어집들을 탐독하고 있다 

 

2011년에는 1년간 백련암에서 정진하며 100일간 매일 1000배와 능엄주 108독을 했다. 100일기도가 끝나고 나서는 매일 1000배와 능엄주 21독을 계속했다. “부산 고심정사에서 2년 정도 소임을 살고 또 백련암에서 정진하면서 제 나름대로 진정한 백련 문도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며 스님이 웃었다. 

 

혜달 스님은 성철 스님의 정진과 회향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 말씀들 중 ‘자기를 바로 봅시다’와 ‘남을 위해 기도 합시다’에 항상 주목합니다. 이런 말씀은 누구도 하기 어렵습니다. 큰스님 스스로 수행이 되었기에 나와 남에 대해 확고한 신념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고 봅니다.” 

 

혜달 스님은 성철 스님과 원명 스님의 가르침을 잇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50여 신도들과 인도성지순례를 가서도 보드가야 등 현지에서 아비라기도를 할 정도다.

‘섬 같지 않은 섬’ 강화도에서 ‘외국인 같지 않은 외국인’ 혜달 스님이 만들어가는 수행공동체 연등국제선원의 앞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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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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