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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성철]
‘성철 사상’은 불교의 핵심이 담긴 바른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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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5 년 9 월 [통권 제29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400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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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총림 해인사 수좌 원융 스님 

 

 


 

 

얼마 전 만난 성철 스님 제자인 한 스님이 당신의 백련암 에피소드를 전해주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당신의 출가 초기 이야기를 하던 중 나온 일화 하나.  

 

“해마다 봄이 오면 백련암 식구들은 정해진 일과로 점심을 먹고 나면 화단의 꽃나무 옮겨심기, 큰스님 방 땔 장작 져나르기, 채전 밭일 등 큰스님의 진두지휘 아래 울력으로 바빠집니다. 경험이 없는 선머슴아들의 허둥대는 행동에 ‘스무 살 먹은 놈이나 마흔 살 먹은 놈이나 똑같다’라고 꾸지람을 듣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하.” 

 

여러 번 들었던 내용이어도 들을수록 재밌다. ‘내 일’이 아니어서 더 재미있다는 생각도 하지만, 막상 그 현장에 있었다면 엄청나게 혼났을 거란 생각에 ‘아찔(?)’하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이 다시 일었다. ‘스무 살 먹은 스님’은 누구였고 ‘마흔 살 먹은 스님’은 누구였을까? 당시 성철 스님 상좌들을 보면 고등학교를 마치고 하루 빨리 출가하고 싶어 백련암에 온 스님도 있었고 대학과 군대까지 마치고 직장생활까지 하다 삼십 줄에 들어선 채로 늦깎이 출가를 한 스님도 있었다. 여기 저기 좀 더 알아보니 ‘마흔 살 먹은 스님’은 바로 현재 해인총림 해인사 수좌로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는 원융 스님이었다.  

 


정안사 입구. 해인사 백련암 서울선원이라고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원융 스님을 만나기 위해 서울 사당동에 있는 정안사를 찾았다. 주택이 밀집해 들어선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가서야 입구에 도착하니 ‘해인사 백련암 서울선원’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조그만 계단을 올랐다. 몇몇 신도님들이 법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정안사는 여느 성철 스님 문도사찰과 마찬가지로 아담한 규모의 사찰이다. 법당과 선방, 공양실, 종무소가 들어선 지하 1층, 지상 1층의 본채와 작은 요사채인 진진당(眞眞堂), 주지스님 집무실이 전부다.  

 

작은 사격(寺格)에도 시민선방인 묘심선원(妙心禪院)을 운영하고 있는 것 역시 성철 스님 문도사찰만의 특징이다. 이번 하안거에는 20여명이 방부를 들였다. 또 매월 정기적으로 초하루, 보름법회는 물론 능엄주 54독(매월 셋째주 토요일)과 삼천배 정진(매월 둘째, 넷째주 토요일) 등을 한다는 것 역시 비슷하다. 

정안사 주지인 일규 스님의 안내로 원융 스님에게 삼배(三拜)를 올리고 본격적으로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정안사 전경. 

 

늦게 만난 불법(佛法), 그래서 더 절실한…

 

“불교를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은 나이 서른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문 문화면에 동국대 불교대학장을 역임했던 이기영 박사의 글이 실렸는데, 이 박사가 학생들로부터 이교도(異敎徒)라는 의혹을 받고 학장직에서 물러나고 나서, 그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내용이었어요. 내용 중 청담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莫憎愛하라’(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마라)고 한 법문의 힘으로 참아낼 수 있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막증애하라’는 말에 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느 종교, 철학, 문학, 사상 등에서도 아직 듣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순간 놀라움과 환희심을 갖게 되었어요. ‘청담 스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기에 이런 말씀을 다 할 수 있으실까?’ 생각하고 알아본 결과, 조계사에서 토요일이면 법문을 하신다고 해 조계사에 갔습니다.” 

 

청담 스님은 당시 조계사에서 재가불자 모임인 원각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금강경』을 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말석이었지만 스님은 청담 스님을 만난 것 자체가 기뻤다.  

 

“청담 큰스님께서는 법문이 끝나고 도선사로 가시던 도중에 선학원에서 잠시 쉬셨는데, 저는 큰스님을 뒤따라가 다짜고짜 인사를 드리고 나서 ‘큰스님, 막증애하라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시고 큰스님께서는 얼굴이 환히 펴지시면서 몹시 기뻐하셨어요. 그때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금강경』 법회에 나가게 되었어요. 『금강경』 법문이 끝나고 『신심명(信心銘)』 법문을 들었는데, 거기서 ‘막증애’를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신심명(信心銘)』 첫 구절이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잖아요. 그 말씀을 듣고 정말 환희용약(歡喜踊躍)하여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됐습니다.” 

 


그림자처럼 성철 스님을 시봉하던 모습 

 

원융 스님은 매일 『신심명(信心銘)』을 수지독송하면서 청담 스님이 내려준 ‘무(無)’자 화두를 참구했다. 늦게 공부를 시작한 만큼 한가하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공부에 매진할 즈음 갑자기 청담 스님이 열반에 들었다. 원융 스님에게는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진 듯한 아픔과 슬픔”이었다. 그래도 스님은 다른 거사님들과 마음을 모아 청담 스님의 『신심명』 법문 녹음을 풀기 시작했다. 밤을 새워 가며 작업한 결과 『마음의 법문』이라는 이름으로 청담 스님 100일재 영전에 법공양으로 올렸다. 훗날 성철 스님의 법어집 중 하나인 『신심명 증도가 강설』도 스님이 힘을 보태 출판이 되었다. 

 

“어떻게 인연이 되었는지 제가 두 큰스님의 『신심명』을 결집(結集)할 행운을 가졌는데, 불교 역사상 ‘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요, 가장 훌륭한 글’로 평가되는 책이 제 마음 속에 커다랗게 자리했습니다. 지금까지 일송(日誦)은 중요한 일과 중 하나입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신심명』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모를 때는 그것이 금과옥조이지만, 알고 보면 흙덩이보다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두를 열심히 참구해서 자성을 확실히 깨쳐야만 『신심명』의 바른 뜻을 알게 된다’고 하신 말씀은 지금까지 귀에 쟁쟁합니다.” 

 

그렇게 청담 스님의 장례를 마무리할 때쯤 스승의 인연이 다시 찾아 왔다. 1971년 11월, 청담 스님의 다비가 끝나고 서울의 한 신도 집에서 잠깐 쉬고 있던 성철 스님을 친견하게 된 것이다.  

 


법전 성철 혜암 일타 스님을 모시고 선 원융 스님 

 

 

“큰스님께서는 평생의 도반을 잃으셔서 그랬던지, 다소 피로해 보이셨어요. 얼굴은 까무잡잡해 보였지만, 또렷하면서도 커다란 눈으로 저를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원각회 김경만 회장님이 저를 큰스님께 ‘공식적’으로 인사시키는 자리에서 대뜸 ‘이 젊은이가 큰스님께 공부하러 간다고 합니다’고 말해 버렸습니다. 마음은 있었지만 ‘결심’을 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저의 출가가 공식화 되어버렸습니다. 하하.”   

 

원융 스님은 해를 넘겨 백련암으로 갔다. “큰스님을 찾아뵈었더니, 반겨주시면서 서울에서 보신 걸 기억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조금은 홀가분하게(?) 백련암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출가할 때 제가 서른다섯이었는데, 먼저 와 있던 행자 중 한 명의 나이가 열여덟이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저를 혼낼 때 항상 ‘스무 살 먹은 놈이나 마흔 살 먹은 놈이나 똑같다’고 하셨어요. 사실 나이 어린 행자와 비교 당하면서 혼날 때는 마음이 좀 그랬습니다. 하하.”

 

12년간의 장좌불와(長坐不臥)

 

출가를 하고 나서 스님은 ‘백련암 커리큘럼’에 따라 공부를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본어를 공부하며 경전들을 보기 시작했다.

 

“백련암에서 처음 마음에도 없는 일본어를 익혀서 큰스님께서 주시는 책들을 다 받아 보는데는 2년쯤 걸렸습니다. 말하자면 ‘백련암 이력’인 셈인데, 전통강원의 주요 교과목들을 포함해서 『천태사교의』, 『화엄오교장』, 『법화』, 『유식』 등을 마치면 『임제록』, 『벽암록』, 『정법안장』, 『정법안장수문기』 등을 주셨어요. 일본 조동종 개조 도원(道元) 스님의 『정법안장』은 100편의 법문이 함께 수록된 단행본이었는데, 그 가운데 「행리(行履)」편을 읽고 관심을 끄는 한 분의 행리가 있었습니다. 백련암 저녁 예불이 끝나면 큰스님을 모시고 간단히 차 마시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큰스님께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에 대해서 여쭈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법상 스님에 대해서 소참법문(小參法門)식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법상 스님이 ‘마음이 곧 부처이다〔卽心是佛〕’는 마조의 말씀 끝에 돌아갈 곳을 얻어서 그 길로 대매산으로 들어가 30년을 하산치 않고 용맹정진하였던 이야기며, 법상 스님이 읊었던 게송 ‘꺾여 버려진 고목이 찬 수풀을 의지해 있나니 봄을 맞이하여 마음 변치 않음이 몇 해이냐? 나무꾼도 마주쳐 거들떠보지 않거니 대목인들 어찌 애써 챙겨가랴.(摧殘枯木依寒林하니 幾度逢春不變心이냐 樵客遇之猶不顧러니 郢人那得苦追尋이리요)’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 문도들은 큰스님께서 주시는 책들을 다 읽고 난 다음에 화두를 받는 것이 보통인데, 저는 혼자서 자꾸 정진하는 모습을 보인 때문인지 남보다 빨리 ‘삼서근(麻三斤)’ 화두를 주셨습니다.”

 


1975년 겨울 사형제 스님들과 함께 한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가 원융 스님이다 

 

스님은 화두를 들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음은 급했지만 공부의 속도는 더뎠다. 스님은 스스로 “둔근(鈍根)이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희망을 가졌다. 성철 스님이 “둔근이라야 참선한다.”고 격려해줬기 때문이다.

 

신심(信心)이 두텁고 이미 발심(發心)까지 되어 있었던 스님은 성철 스님을 모시고 내려간 해인사 퇴설당에 놓여 있는 좌복을 보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결심했다.  

 

“『정법안장』을 읽으면서 가섭존자의 12두타행(頭陀行) 가운데 ‘단좌불와(但坐不臥, 앉기만 하고 눕지 않는다)’가 이미 머릿속에 있었고, 또 큰스님께서도 젊은 시절 장좌불와를 10여년 하셨다는 소문은 납자(衲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저도 한번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큰스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 번 해보라’고 하셨어요. 1974년 여름에 큰스님께서 주신 책들을 대강 다 보고 나서 큰절(해인사) 선원으로 입방하였는데, 큰스님께서 ‘장좌불와를 하니까 조사전에서 정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지내보니 퇴설당이 더욱 마음에 들어서 그때부터 10년을 거기서 지냈습니다.”  

 

성철 스님은 백련암에서 장좌불와를 준비하는 원융 스님에게 운동을 겸해서 하루에 나무 한 짐씩 하는 일과를 주었다. 그러다 원융 스님은 큰절로 내려왔다. 큰절에 왔을 때 성철 스님은 다시 하루 300배의 일과를 줬다.  

 

“절하는 일과는 특히 장좌불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어요. 밤새 앉아 있다가 새벽에 입선하고 나서 엄습해 오는 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몸을 풀고 회복하는 데 절보다 더 좋은 것이 없어요. 아침 다섯 시에 방선하고 나서 법당에 가서 300배를 하며 땀을 흘리고 나면 지친 피로도 풀리고 몸이 새로 생성되는 것 같아서, 다시 하루의 일과를 생기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좌불와가 그리 쉽지 않았다. 밤새 앉아 있다 보니 대중 정진시간에 남보다 더 졸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을 지켜본 한 구참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얘기를 건네, 성철 스님은 원융 스님에게 장좌불와를 그만 풀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스승의 당부가 원융 스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새로 지은 선원에서 2년여 더 장좌불와를 했다.

 


문도스님들과 매화산에 오른 원융 스님 

 

“당시 공부경계를 스스로 살펴볼 때 공부의 밀도가 소가 밟아도 깨지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나, 그것은 얼마 가지를 못했고 이내 평범한 공부자세로 돌아가게 되어 버렸어요. 장좌를 풀고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때가 공부하는 것처럼 했던 때였습니다. 적어도 큰스님께서 말씀한 ‘수좌 5계’를 비슷하게나마 지켜야만 장좌의 일과를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수좌 5계’를 완벽하게 지키기란 몹시 어려웠고, 지켜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완벽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대중에게 더러 말씀하시기를 ‘5계를 완전히 지킨 사람은 아직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하셨거든요. 지금의 공부와 장좌할 때의 공부를 비교하면 더 진전했느냐 후퇴했느냐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다만 대혜 스님의 말씀에서처럼, ‘선 곳은 이미 익고, 익은 곳은 이미 선다(生處已熟 熟處已生)’는 법문을 가지고 스스로를 비춰보는 의미가 있겠으나, 그래도 이렇게만 쉬어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큰스님은 명실상부한 본분종사(本分宗師)”

 

원융 스님은 성철 스님의 시자로서 그리 민첩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더 아쉽다고 한다. 

“백련암과 큰절 선원에서 20여 년 간 시자(侍者)로서 큰스님을 모시는 동안 민첩하고 눈치 빠른 선타바(先陀婆) 시자는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오로지 큰스님께서 주시는 책 받아보고 법문 정리하고 좌복에서 조는 일에만 능했지 다른 일에는 어두웠어요. 처음 출가를 결심할 때부터 오로지 이 일만을 위해서 해 마치는 순간까지 서원코 놓지 않겠다는 신심과 원력뿐인지라, 다른 일들에는 널빤지 짊어진 사람(擔板漢)일 따름이었네요. 하하.”

 

그러면서 스님은 성철 스님을 “명실상부한 본분종사(本分宗師)”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큰스님께서는 평소 출입을 자제하시고 사람 대하는 일을 몹시 제한해 오신 결과, 결국 열반을 기점으로 해서 봇물 터지듯이 ‘성철 스님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쇄도하였습니다. 이는 큰스님의 수행과 도덕의 결과라고 보아야 옳겠으나, 뒷날 사람들은 큰스님을 한마디로 어떤 스님이었다고 불러야 할까요? 

 


2014년 하안거 대중들과의 기념사진. 원융 스님 바로 왼쪽이 맏상좌 일선 스님이고 오른쪽이 정안사 주지 일규 스님이다. 

 

일반적으로 큰스님들을 지칭하는 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대선사(大禪師)라는 칭호는 선원에서 평생 동안 선수행을 하여 본분사(本分事)를 체달한 선지식 스님을 두고 일컫는 이름이고, 종단의 법계(法階)로서는 대종사(大宗師)로 부르기도 합니다. 산중의 총림에서는 방장이셨고, 종단에서는 종정으로서 대중의 지도자의 위치에 계셨지만, 큰스님의 평생 모습을 본다면 역시 ‘본분종사(本分宗師)’라는 칭호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본분종사’라는 칭호는 불자들 사이에서도 쉽게 쓰이는 용어는 아니다. 선문(禪門)에서 대선사가 참선법(參禪法)의 도리로써 학자를 제접하고 후학을 지도하는 면모를 지칭할 때 본분종사라는 단어를 쓴다. 선문에는 본분이라는 말과 연관된 용어들이 많다. 본분도리, 본분납자, 본분종사 등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본분종사란 인간이 지닌 본래모습 그대로를 체달하여 중생이 본래 부처이고 범부 이대로가 성인이라고 하는 본분도리로써 여러 대중에게 가르침을 펴서 그 도리를 바로 알도록 하는 스승을 일컫는다. 본분이란 말은 결국 불교의 핵심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큰스님께서는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方丈)이 되시면서 중국 총림의 틀 그대로를 재현하셨습니다. 총림은 처음부터 지도자를 정점으로 해서 그 아래에 공부를 하여 자신의 본분사를 체달하고자 하는 본분납승들과 함께 사부대중이 모여든 수행집단을 말합니다. 

 

종정(宗正)이란 종단의 상징적인 어른이면서도 모든 종도의 가장 표상이 되는 위치에 계신 분으로서 옛날로 보면 국사(國師)나 왕사(王師)에 해당하는 지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보면 자칫 권승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는 자리이기도 해요. 큰스님께서는 종정이 되시기 전에도 그랬고 종정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종정이 되신 이후에는 특히 그 부분을 유념해서 보다 철저한 수행자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법전 전 종정예하를 모시고 해인사 대중과 함께 한 모습 

 

원융 스님은 본분종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성철 스님이 생전에 본분종사의 표상으로 자주 예를 들었던 중국의 육조혜능 대사와 일본의 관산혜현 선사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육조혜능은 당나라 측천무후가 장안으로 와 국사(國師)로서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내려달라고 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 반면 신수 대사는 국사로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과 낙양 두 곳을 옮겨 다니면서 3명의 황제를 보필하며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신수의 가르침은 몇 대 못가 끊어졌지만 육조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일본의 관산혜현 선사 역시 수행자의 길만 걸었던 선지식이다. 관산 선사 역시 왕의 청을 거절하고 철저하게 은둔의 삶을 살았다. 변색을 하고 남의 머슴살이로 들어가 살면서 자기 공부를 했을 정도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묘심사 주지를 맡았지만 항상 누더기 한 벌로 일관하면서 낮에는 풀을 뽑고 허드렛일을 하는 등 그 모습이 하루도 변함이 없었다.

  

“큰스님께서는 누차 우리에게 육조 대사와 관산 선사의 가풍을 교훈처럼 말씀하셨고, 큰스님 스스로도 평생을 그와 같이 살아가셨습니다. 56세 때 해인총림 방장에 취임하기까지 하루에 나무 한 짐씩을 일과로 실행하셨고, 고인(古人)들처럼 본분사를 위해서는 두타행(頭陀行)을 아끼지 않는 삶을 사셨어요.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각고정진하여 보드가야에서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나서 맨 처음 인천(人天) 대중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본분도리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을 살펴보시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일체중생이 모두 다 불성이 있구나. 오로지 망상의 구름이 자성을 가리어 볼 수가 없을 뿐이로다.’ 

 

본분도리란, 단지 참선문중에서만 살림살이로 표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것은 불교의 핵심이며,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입니다. 항간에는 ‘돈오돈수(頓悟頓修)’와 같이 큰스님께서 내세우신 독특한 이론을 들어 일반적으로 ‘성철 사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큰스님이 내세우신 사상은 결코 큰스님만의 사상이 아닙니다.

 

큰스님께서는 결국 우리 선종의 근본사상이자 가장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사상을 표방하셨을 따름이지 자기 학설을 만들어 따로 독특한 이론을 펴신 것이 아닙니다. 큰스님은 한마디로 본분종사로서 일관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큰스님의 사상이야말로 우리 선종의 사상이고, 선종의 사상은 불교의 핵심을 차지한 바른 이념입니다.” 

 

원융 스님은 본분종사로서의 성철 스님의 삶과 수행을 강조했다. 그러고 보니 스님은 벌써 십 수 년째 해인총림 대중들을 이끌고 있는 수좌(首座)이기도 하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당부하는 말씀도 빼놓지 않았다.  

 


스승 성철 스님을 모시고 원택 스님과 함께 한 원융 스님 

 

“참선 정진하는 대중의 숫자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결코 줄지를 않아요.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보면 좋고도 좋은 세상인데, 그래도 이 도리를 궁구하느라고 젊은 납자들이 꼿꼿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한편으론 외경스런 마음까지 듭니다. 

 

인간의 모든 동작가운데서 이 참선하는 모습처럼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같이 정진하다가도 어쩌다 단엄하게 앉아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찌르고 들어갈 만한 추호의 허점도 없이 완벽합니다. 대중여러분들이 지금의 모습 그대로 정진해서 좋은 소식을 전해주기를 바랍니다.” 

 

성철 스님 열반 3일전 누워있는 스승에게 원융 스님이 물었다.

“스님, 이러한 때 스님의 경계는 어떠십니까?” 

깊이 잠든 것 같던 성철 스님이 벌떡 일어나 벼락같이 원융 스님의 뺨을 힘껏 쳤다고 한다. 세상에 오래 계시면서 대중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며 여쭈었던 제자의 우문(愚問)에 스승은 현답(賢答)으로 응대했다. 아직도 원융 스님의 가슴 속에는 스승 성철 스님의 가르침이 천둥번개와 같이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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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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