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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연수의 돈오돈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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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5 년 10 월 [통권 제3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32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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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밀 선사가 입적한 100년 후 연수 선사가 그의 이론을 섭취하면서 새로운 수증론(修證論)을 구축하였습니다. 그것은 의논의 전제인 인간관(人間觀)을 전환하여서 종밀 선사가 일반의 중생들은 실천 불가능한 것으로 본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연수 선사는 실천 가능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권한 것입니다.

 

연수 선사가 종밀 선사와 다르게 돈오돈수, 돈오원수(頓悟圓修)를 자기의 입장으로 한 것은 대체 어떠한 이유일까요? 점수(漸修)가 아닌, 돈수・원수에 입각한 연수 선사의 수증론은 불교사(佛敎史)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접하게 되는 것일까요? 

 

연수 선사는 말합니다.
“상상근(上上根)이라면, 심(心)이 공(空)함을 돈오(頓悟)하여, 그 순간에 표면에 나타나 있는 번뇌의 습기와 장래에 싹을 틔울 가능성이 있는 번뇌의 종자를 함께 없앴기 때문에, 수행의 계제(階梯)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해오(解悟)나 증오(證悟)등을 설치하는 것은 아직까지 중하근(中下根)의 사람들을 이끌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연수 선사의 이해에 의하면 상상근(上上根)의 사람(돈오돈수를 행하는 사람)은 마음의 공적(空寂)을 ‘돈오’한 순간에 현재와 미래의 모든 번뇌를 멸진하였기 때문에 수행의 점차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하여 종밀 선사는 “중하근(中下根)의 사람은 심(心)의 공적(空寂)을 알고 믿는다 할지라도, 미세한 번뇌를 순간에 없앨 수가 없기 때문에 ‘해오(解悟)’와 ‘증오(證悟)’ 등의 점차(漸次)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돈오돈수’나 ‘돈오점수’라고 하는 언어 자체는 종밀 선사가 사용한 것이지만, 종밀과 연수와의 수증론의 구조가 달랐던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밀 선사가 납자들에게 제시하는 수증론은 ‘해오(解悟)-점수(漸修)-증오(證悟)’라고 하는 단선적인 것인데 대하여 연수 선사는 상상근(上上根)의 ‘돈오(頓悟)-돈수(頓修)’와 중하근(中下根)의 ‘돈오(頓悟)-점수(漸修)’라고 하는 두 개의 흐름을 설정하여서, 복선적인 구조로 수증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연수 선사가 종밀의 수증론에 가한 개변(改變)은 이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종밀 선사가 ‘돈오점수’를 선양하는 배경에는 마조선에 대한 비판이 있었지만 연수 선사는 마조선에 대하여 종밀과는 전혀 다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연수 선사의 이해에 의하면 모든 언어(能全)의 말하는 대상(說示對象=所全)은 모두 일심(一心)이며, 그 일심(一心)에는 ‘무루의 성덕(無漏의 性德)=깨끗한 德性’과 ‘진여의 만행(眞理의 萬行=진리에 향해가는 일체의 善行)’이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조 선사는 이러한 일심(一心)을 단적으로 열어 보이고(開示), 그 접화(接化)를 받은 상상의 근기(上上根 機)의 납자는 덕성과 선행을 갖춘 청정한 일심(一心)을 원만히 깨닫기 때문에, 번뇌를 제거해야 할 ‘점수(漸修)’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하여 종밀 선사의 교화대상에는 일심(一心, 所全)을 볼 수 없는 열악한 근기를 가진 납자가 포함되어 있기에, 각각의 능력에 따라서 적절한 이해가 얻어져야 하므로 모든 언어(能全)를 단계적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연수 선사는 마조 선사의 접화(接化)를 상상근기(上上根機)를 대상으로 함으로, 다양한 아래근기를 대상으로 하는 종밀 선사의 가르침보다도 고차적인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조 선사를 불완전한 ‘돈오(頓悟)’에 안주하는 ‘임병(任病)’이라고 비난한 종밀 선사와는 전혀 다른, 연수 선사의 독자적 이해입니다.

 

종밀 선사는 단계적인 수행의 도(道)를 약으로써 병을 치료하는 과정으로 비유하고 있지만, 연수 선사에 있어서는 ‘상상근(上上根)’이 가는 도(道)는 ‘바로 지금 무심(無心)하여서 약과 병을 함께 없애 교(敎)와 관(觀)을 모두 쉬게 한다’고 하는 말씀과 같이 약과 병을 함께 해소하는 경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연수 선사는 상중근(上中根) 이하가 가는 도(道)로서 규봉 선사의 ‘돈오점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상상근(上上根)’의 도(道)로서 ‘돈오돈수’를 제시함으로써 복선적인 수증론을 구축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수(頓修)’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위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정리하자면 ‘자비(慈悲)’, ‘지계(持戒)’, ‘만선(萬善)’이라는 세 개의 요소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행을 자비, 지계, 만선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이전의 선종에서는 보이지 않는 개념으로써 연수 선사의 수증론을 특징 지우는 중요한 점입니다.

 

일체의 중생이 일심(一心)의 가운데 있음을 깨달을 때 자심(自心)은 ‘동체(同体)의 대비(大悲)’라고 하는 본래의 자리에 있으며 그 행위는 자연히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행이 될 것이니 연수 선사는 동체(同体)의 대비(大悲)가 ‘돈수(頓修)’의 제1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일심(一心)에는 본래적으로 계율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 일심(一心)을 원만하게 깨닫게 되면 모든 행위가 자연히 계율이 된다고 연수 선사는 말합니다. 의식적으로 계율을 지켜 나간다면 그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계(戒)를 갖춘 일심(一心)의 근원에 있음을 자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돈수(頓修)’의 제2의 특징입니다.

 

연수 선사는 “일심(一心)이 만선(萬善)의 근원으로써 일심(一心)을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만선(萬善)을 행한다. 만선(萬善)이란 선악의 분별을 넘어선 곳에서 행해지는 불교의 모든 실천을 가리킨다. 깨치기 전에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위해 선행을 닦는 것임에 대하여 깨달은 후에는 일거일동의 모두가 일심(一心)에 뿌리를 둔 이타행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돈수(頓修)’의 제3의 특징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마조선에 대한 종밀과 연수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 입장의 같음과 다름은 ‘임운(任運)’에 대한 이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조 선사는 말했습니다. “…苦体地意, 但可 隨時著衣喫飯, 長養聖月胎, 任運溫時, 更有何事… ‘만약 마음이 부처임을 체득하면, 다만 마음대로 옷을 입고 밥을 먹을지라도 깨달음이 자라고 커질 것이니, 걸림 없이 마음대로 시간을 보내도 된다. 이외 무슨 다른 일이 있겠는가?’”

 

마조 선사는 심(心)이 부처(佛)라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걸림 없이 마음대로(=任運)” 시간을 보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종밀은 불완전한 ‘돈오(頓悟)’에 편안히 머물러서 ‘점수’를 포기한 ‘임병(任病)’이라고 비판하고, 연수는 자비에 기초한 무심(無心)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돈수’의 경계로 보았는데, 확실히 마조선에는 그 양쪽의 해석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확실히 마조 선사는 돈오 이후의 실천에 대해서는 거의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밀이 마조의 임운(任運)을 불완전한 깨달음을 누리는 임병(任病)이라고 보고 그것을 고치는 수단으로 점수의 필요성을 설함에 대하여, 연수는 마조 선사의 임운(任運)을 부처님(佛)의 ‘돈수’와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써 마조선의 무사(無事)가 안이한 현실긍정에 빠지는 위험성을 회피하였습니다. 연수에 의하면 마조 선사가 ‘마음이 부처, 卽心卽佛’이라고 말함과 같이 우리들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인 이상 그 마음 그대로 펼치는 것은 그 행위도 스스로 부처님의 행위가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임운(任運)하여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임운(任運)관은 연수 선사의 창안이 아니라 당시 경전에도 잘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부처님(佛)에 의한 중생제도가 임운(任運)의 활동을 한다는 것은 인도에서 유래하여 중국에 널리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수의 해석에 의하면 인도 유래의 전통적인 부처님(佛)의 임운(任運=중생구제=頓修)과 중국에서 일어난 마조선의 임운(任運=옷입고 밥먹는 일=無事)을 동일한 것으로 봄으로써 종밀의 이론을 환골탈태하여 마조선을 최고의 경계에 이르게 한 독자의 수증론을 구축하였습니다.

 

또 제불(諸佛)이 깨친 일심(一心)이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행을 함께 성취하는 불심(佛心)이며 ‘걸림 없는 있는 대로의 심(心)이란 자비심이며, 스스로 계율을 따라 지키며 모든 선행을 실천하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마음입니다. 불심(佛心)대로 불(佛)로써 활발히 활동하는 이것이 연수 선사가 말하는 돈오돈수입니다

 

『명추회요』를 발간하고서 야나기 미키야스 박사의 저서인 『영명연수 종경록의 연구』의 일부를 참고해 정리해 보았으니 많은 이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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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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