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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종용록(從容錄)』을 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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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5 년 11 월 [통권 제31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05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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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에서 돌아오니 책상 위에 『종용록(從容錄)』 번역본 5권이 한 질로 되어 놓여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1권부터 5권까지 차례와 제목을 훑어보면서 번역자 석지현 스님과 민족사 윤창화 사장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 큰스님의 뜻에 따라 <선림고경총서> 37권을 변역할 때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선림고경총서> 간행에 있어서 첫 번째로 『벽암록』을, 두 번째로 『종용록』을 출판하려고 시작하였던 사업인 『종용록』이 <선림고경총서>의 32, 33, 34번으로, 『벽암록』이 35, 36, 37번째 권으로 어렵게 회향하였는데, 민족사에서 발행한 『종용록』 5권을 받아드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지나간 일들의 사연을 적어 볼 마음이 났습니다. 

 

처음 <선림고경총서> 발행을 계획하면서 첫 번째로 『벽암록』을 번역자에게 번역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편의 원고가 쌓여가더니 저도 모르게 마음에 안도감이 들며 번역 작업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첫 번역자의 번역에만 의존해서 책을 낼 것이 아니라 ‘초고본’을 윤문할 팀을 꾸려서 초고를 윤문하여 출판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신규탁 선생과 이인혜 씨 등을 소개받아 윤문팀을 꾸렸습니다. 

 


 

 

“『벽암록』은 선문의 제1서인 만큼 세상의 관심이 지대할 터인데 이대로 제일 먼저 출간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는 판단이 들어 조금 더 보완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윤문을 좀 더 한 다음에 발간을 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습니다. 그리고 『종용록』에 대해서는 번역자를 마땅히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중 봉선사 월운 큰스님께서 1980년대 초에 『선문염송』을 번역하셨기에 『종용록』 번역을 부탁올리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월운 큰스님께서 동국역경원 사업도 많으신데 과연 허락해 주실까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러던 차에 신규탁 선생이 일본 동경대학교로 유학을 떠나면서 “스님! 『벽암록』은 제가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차분히 연구하여 번역을 마쳤으면 합니다. 『벽암록』 출판을 너무 서두르지 마시지요.”라며 청을 해서 “기다리겠습니다. 학위 중인데 너무 무거운 짐이 안 될지 걱정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신 선생이 일본으로 떠나고 나서 얼마 후 저도 용기를 내서 봉선사로 월운 큰스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큰스님! 바쁘신 가운데 찾아뵈었습니다. 지금 성철 종정스님의 명으로 백련암에서 선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종용록』 번역을 맡길 수 있는 능력자를 찾지 못해서 종정스님께 말씀드리고 염치불구하고 큰스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세월에 구애되지 마시고 『종용록』 번역을 해주십사 청을 드립니다.” 

 

“그래요? 내 바쁜 거 원택 스님도 잘 알잖아요? 그런데 나도 『종용록』을 한 번 번역해 볼까하는 생각도 한 적은 있지. 같은 번역 사업이니 한 번 해볼까? 그러나 너무 빨리 조르지는 않기로 하지.”라고 하셨습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선선히 승낙하신 셈이 되어서 저는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습니다.”고만 연발하며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때로 원고 번역과정이 궁금하였지만 ‘조르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에 자주 찾아가 여쭐 수가 없었습니다. 

 

인편으로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월운 큰스님의 근황에 대해서 묻기도 하였지만 『종용록』 번역에 대한 얘기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기다리다가 2년여의 세월이 지나 봉선사로 월운 큰스님께 문안 인사를 갔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반가워하시기보다 멋쩍은 모습으로 “원택 스님이구먼. 그래 그때 내가 약속을 잘못 했어. 나도 번역하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승낙은 했었는데 생각보다 그 어록 번역이 어렵네. 포기한다는 말은 안 할 테니까 소식 있을 때까지 넉넉히 기다려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번역이 어렵네.”라는 말씀에 가슴이 철렁했지만 기다리라고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감사합니다.”고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던 기억입니다. 

 

동경대 동양철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던 신 선생이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안부와 함께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지도교수님이 정해졌는데 지도교수님께서 암파문고(岩波文庫)의 『벽암록』을 새롭게 번역하게 되었다 하시며 『벽암록』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마침 저도 『벽암록』의 한글 번역 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벽암록』 번역은 빨리 진행될 것 같습니다.” 

 

어렵게만 생각되던 『벽암록』과 『종용록』의 번역 작업이 뭔가 밝은 전망을 갖게 되니 큰 근심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1년여의 세월이 지난 뒤 봉선사에서 “다녀가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쿵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봉선사로 달려갔습니다. 

 

“원택 스님! 그때 『종용록』 번역을 허락해놓고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르네. 내 번역도 얼마나 많은데 말이지. 그러나 백련암 선서 번역사업도 작은 일도 아니고, 성철 큰스님께서 마음 두신 일이라 하여 포기하지 않고 하기는 했지만 내용이 어려워 고생 꽤나 했네. 이게 원고이네.” 

 

월운 큰스님께서 3년 넘게 걸린 작업 끝에 건네주신 『종용록』 원고를 받아든 저의 두 손이 떨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애써주셨으니 너무 고맙고 고마워 눈물이 핑그르르 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돌아와 성철 큰스님께 저간의 말씀을 드리며 『종용록』 원고를 보여 드렸습니다. 

 

“그 바쁜 스님이 <선림고경총서>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니 정말 고마운 일이군. 운허 큰스님께서도 해인사를 더러 다녀가셨지. 우리시대에 참 점잖은 어른이셨어. 옆에서 이렇게 애쓰는데 번역사업 마무리 잘 해라 인마!” 

 

이렇게 해서 월운 큰스님과 신규탁 교수 덕분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종용록』과 『벽암록』 완역이라는 큰일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선문에서는 옛 조사들이 남긴 말씀 중에서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것을 고칙(古則)이라고 합니다. 설두중현(980~1052)이 설두산의 자성사에 머물면서 고칙 가운데 100개를 정리하고 거기에 송을 붙인 것이 『설두송고』입니다. 설두 스님은 운문종의 4세입니다. 이 『설두송고』를 저본으로 원오극근(1063~1135) 스님이 당시의 수행자들에게 제창(提唱)한 것이 『벽암록』이며 『벽암집』 또는 『불과원오선사 벽암록』 등으로 불려왔고 ‘종문제일서(宗門第一書)’라는 칭호와 함께 선서(禪書)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설두 스님이 뽑은 ‘본칙’과 ‘송’에 원오 스님이 덧붙인 ‘수시’, ‘평창’, ‘착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벽암록』은 문학적으로도 매우 밀도 있게 완성되어 중당 이후의 문단의 중심적인 사조인 돈오무심(頓悟無心) 사상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송대의 『창랑시화(滄浪詩話)』 등의 시평어집에서 당대에 유행하던 돈오돈수 사상을 근거로 당시(唐詩)를 평가한 것을 상기할 때 『벽암록』이 갖는 불교문화사적 위치는 대

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종용록』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천동정각(1091~1157)이 설두 선사의 예에 따라 고칙 100개를 뽑아 거기에 송을 붙인 『정각송고』에 조동종의 만송행수(1166~1246)가 본칙 앞에 시중(示衆) 또는 수시(垂示)라는 것을 썼고, 본칙과 송 끝에는 각기 착어(著語)라는 것을 붙이니, 이것이 평창(評唱)이요, 본칙과 송의 구간(句間)에 단평(短評)을 각주(脚註)로 넣으니 이것 또한 평(評)입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종용록』 6권은 조동종계의 송고서로서 임제종계의 『벽암록』 10권과 쌍벽을 이루는 선적입니다. 여기에 임천(林泉)의 『공곡집(空谷集)』과 『허당집(虛堂集)』을 합하여 평창사가(評唱四家)라 하여 유명하나, 우아한 문장, 예리한 기지에 있어서는 단연 『종용록』이 으뜸인 것으로 유포되고 있습니다. 

 

이상은 『벽암록』과 『종용록』의 해제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종용록』에 실린 야율초재(119~1243)의 ‘종용암록서’와 담연 거사에게 부치는 편지에 적힌 ‘평창 천동종용암록’에 쓰 인 촌로 만송 스님이 쓴 글을 내용으로 『종용록』이 세상에 나온 인연을 간략히 정리해 봅니다.

 

“야율초재 거사가 금나라가 망하고 물러나 정진을 거듭하며 징공(澄公) 선사에게 도 구하기를 청하니 징공 스님이 조용히 말했다.

지난 날 그대는 요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리고 유학하는 사람은 대부분 불서를 깊이 믿지 않고 어록을 뒤적이면서 말밑천이나 삼으려 하기 때문에 내 감히 수고스럽게 선가의 매서운 수단을 써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과연 본분사를 가지고 내게 물어오는데 내 어찌 전의 허물을 답습하여 입 아프게 이야기해 주지 않으랴. 그러나 나는 늙었고, 평소 유학에는 통달치 못했으니 그대를 가르칠 수가 없다. 만송(萬松) 노인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는 유가와 불도를 겸비하고 종지와 설법에 모두 정통하시며 걸림 없는 말솜씨를 가지셨다. 그대는 그 스님을 뵙는 것이 좋겠다.

 


 

 

내가 만송 노인을 찾아뵙고 침식을 잊고 지낸 지 거의 3년이 되었다. 나는 외람되게도 스님의 법은을 입고 자식으로 인가받아 담연거사 종원(湛然居士 從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후 다시 칭기스칸의 부름을 받아 행재소(行在所)에 나가 호종관(扈從官)으로서 서쪽으로 정벌을 나가게 되었으므로 스님과 몇 천리나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종문에 천동(天童)이라는 분이 있어 송고(頌古) 100편을 지었는데 그것을 절창(絶唱)이라고 한다. 나는 만송 노인에게 ‘이 송고에 평창을 붙여 후학을 위해 일깨워 주십사’ 하고 간청하는 편지를 7년을 두고 전후 아홉 차례나 보냈는데 이제야 답장을 받게 되었다. …… 경성(京城)의 사제 종상(從祥)이가 이 책을 세상에 펴내서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 왔다. 그래서 이에 서(序)를 쓴다.”

 

만송 스님은 담연 거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한다.

 

“우리 종문의 설두와 천동은 공자 문하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에 비길 만하고 두 스님의 송고(頌古)는 시단의 이백과 두보에 비길 만하다. …… 나 만송이 지난 날 천동송고를 평창해 놓은 적이 있는데 병란이 일어난 후 조사의 초고를 보는 일들을 폐하고 있었다. 근래에 연경 보은사로 물러나 달팽이 같은 작은 집을 하나 지어놓고 ‘종용암’이라고 명패를 붙였다. 옛일을 다시 해보려고 도모하던 차에 마침 담연 거사가 완성을 해달라고 간청해 왔다. …… 임오년 말 담연 거사가 굳이 염송해내라는 편지를 보내왔으므로 부득이 집안 허물을 들춰내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누를 끼치게 되었다.”

 

『종용록』의 탄생에 대한 스승과 제자 간의 깊은 신뢰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만송 스님이 『종용록』을 편찬했을 때는 『벽암록』을 지은 원오 스님의 100년 뒤 사람으로 이때는 삼교일치의 사상이 무르익어 갈 즈음으로 용어 사용에 있어서 현저히 중국화 되어 사자성어와 속담이 풍미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민족사의 『벽암록』과 『종용록』 완역의 풍부한 해설과 자료를 출판함에 한 번 더 감사를 드리고 이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선 수행자들의 더 깊은 정진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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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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