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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혹한 속의 봉암사 대중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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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  2016 년 2 월 [통권 제34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095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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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아비라기도를 하던 11월 22일에 신도 대표들이 모여서 동안거 봉암사 대중공양 날짜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소한 추위를 피하니 곧바로 해인사 동안거 7일 용맹정진 기간과 납월 8일 성도절이 이어져 있어서 병신년 1월 19일로 대중공양 날짜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봉암사 대중공양에 대해서는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1993년 11월에 열반에 드신 후 문도스님들이 모여서 큰스님 사후의 일에 대해서 이런저런 논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결정된 일 가운데 하나가 큰스님 생애 가운데 크게 기념해야 될 것이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광복 후 1947년 가을부터 진행한 봉암사 결사였습니다. 결사를 통해 청담 큰스님, 자운 큰스님, 향곡 큰스님과 더불어 성철 큰스님께서 후학들의 정법안장을 다지기 위해 도량을 개설한 큰 뜻을 후대에 전할 필요성이 크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눈 내리는 백련암 

 

그래서 큰스님 열반 후 당신이 열망하셨던 ‘봉암사의 꿈’을 후학들에게 다짐한다는 의미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맞이해서 봉암사 대중공양을 우선해야 한다는 데 이의가 없었습니다. 그 후 1994년 하안거부터 올 동안거까지 22년 동안 변함없이 대중공양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소납이 다리를 다쳐 치료를 하고 요양을 했던 2년여 동안 봉암사를 방문하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22년 동안 매회 80여 명 안팎의 백련암 신도님들은 빠짐없이 봉암사 대중공양에 동참해 오고 있습니다.  

 

봉암사 대중공양 날짜를 잡아 놓고 있던, 지난 12월 중순에 향적 해인사 주지스님께서 6차 화엄 21 천도법회 7번째 49재 법회에 법사로서 참석하여 신도님들에게 법문을 청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계산해보니 그날이 마침 1월 18일이었습니다. 마침 또 월요일이니 일요일에 백련암에 들어가 월요일에 해인사에서 법문을 하고 다음날 19일에 봉암사로 출발하면 일정이 맞아서 승낙을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소한에 대한이 얼어 죽는다’ 또는 ‘소한에 대한이 울고 간다’는 말이 있듯이 소한 추위가 대한보다 더 혹독하다는 것을 많은 체험을 통해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 해는 소한 때 오히려 날씨가 푸근하여 온난화의 현상을 느끼는 따스한 소한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한이 가까워 오니 일기예보가 급변하여 1월 16일부터 기온이 급강하 하며 서울이 영하 12도까지 떨어져서 그 다음 주 끝까지 영하 10도 이하의 날씨가 될 것이라고 예보하니 올해는 때아니게 ‘소한이 대한에 얼어 죽거나 울고 가게 되었다’고 큰 걱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살다보면 해인사 일기도 변화무쌍합니다. 희랑대를 지나 백련암에 오르는 길에 돌다리가 있는데 그 밑까지는 눈이 없다가 그 돌다리에 오면 눈보라가 치는가 하면, 해인사 경비실을 지나 약수암 표지판 부근부터 함박눈이 내리는가 하면 그 바깥은 맑은 하늘이기도 하여서 해인사 경내는 함박눈이 쌓여도 길상암이나 가야는 비가 오거나 또는 흐리거나 할 뿐인 기후입니다. 

 

일요일 오후 6시 어둑할 때쯤 해인사에 도착하니 안내소까지는 멀쩡한데 희랑대까지 차가 겨우 올라가는데 그 후부터는 눈이 쌓여 오를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쌓인 눈길 위를 걸어서 백련암으로 올라갔습니다. 길은 미끄러워 금방 헛발질로 미끄러지는데 마침 상좌가 아이젠을 가지고 와서 신발에 끼고 허우적대며 백련암에 오르니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 9시에 아이젠을 착용한 채 백련암에서 내려오니 밤사이 눈이 녹아 그대로 얼음판 길이 되어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꽈당할 판이라 한쪽은 상좌의 팔을 잡고 한 손은 스틱을 쥐고서 비석거리까지 조심조심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절에 들러 천도재 법문을 마치고 백련암에 가려 하니 길이 얼어서 차가 올라올 수 없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산 넘어 성주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19일 대중공양 행사에 8시에 출발하여 10시를 조금 지나 봉암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봉암사는 큰 눈이 내리지 않아서 가는 길엔 모래를 뿌려 두었고, 눈이 마당에 쌓여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차를 내리자마자 몰아치는 차가운 산바람은 금방 정신이 번쩍 들게 하였고, 센 바람에 흔들리는 낙락장송의 모습은 그대로 또 다른 장관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석곡 주지스님을 찾아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산중 어른으로 계신 적명 수좌스님을 찾아뵙고 정중히 삼배를 올렸습니다. 디스크로 고생하신다 하셨는데 지금은 지팡이도 짚지 않고 다닌다며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다며 다행이라 하셨습니다. 작년 봄에 있었던 해인사 방장 선거를 못내 아쉬워하시며 해인사 안정을 누구보다 바라시고 걱정을 하셔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과 원택 스님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수원 봉녕사 학장이셨던 묘엄 스님께서 구술한 『회색고무신』이라는 자전적 책에는 스님이 20세가 못된 시절에 체험했던 봉암사 시절에 대한 회고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계십니다.

 

경상북도 문경의 희양산에 있는 봉암사에서는 일제 치하 36년 동안 제 모습을 잃어버린 우리나라 불교를 바로 일으켜 세우려는 결의와 각오로 스무 명 넘는 스님들이 무서우리만큼 눈을 시퍼렇게 뜨고 처절한 수행을 하고 있었다.

 

“묘엄이 너, 이절 봉암사가 어떤 절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이름을 드날린 희양산문의 본산이다.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인 신라 헌강왕 5년 지증 국사가 창건하셨고, 그 후 고려 태종 18년에 정진(靜眞) 국사가 중창하셨다. 지금 이 절에 남아 있는 두 탑비가 바로 지증 국사와 정진 국사의 탑비인 기라. 그리고 지금도 서 있는 3층 석탑은 나라의 보물이다.”

 

“그러면 스님, 지금 이 절이 1000년 전에 지은 거란 말씀입니까?”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70여 년 전, 조선 현종 15년에 불에 타버린 것을 신화 스님이 다시 세웠고, 30여 년 전 세욱 스님이 중건하셨다.”

“그러면 이 절은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니네요?”

“그런 셈이다. 하지만 말이다. 이 절 봉암사에서는 고려 때 보조지눌 국사가 수행하셨고, 조선 세종 때 배불정책이 기승을 부릴 적에는 함허득통 스님께서 선풍을 드날린 곳이다. 말하자면 그때 그때마다 새로운 불교의 활력을 되살린 곳이 바로 이 봉암사란 말이다.”

 

“아 예. 그래서 이 봉암사에서……”

“그렇지. 우리가 이 봉암사에서 결사를 하게 된 것도 다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아 예.”

“그러니 묘엄이 너도 이 봉암사에서 수행을 잘 해서 장차 이 나라 불교 비구니계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큰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야.”

 

성철 큰스님과 묘엄 스님이 이렇게 대화를 나눈 시기가 늦어도 1949년 추석 전일 것인데 지금으로부터 67년 전 일입니다. 1950년 3월쯤 청담 큰스님께서 봉암사에서 나와 고성 문수암으로 내려오시므로 1947년 가을에 ‘부처님 법대로 살자’ 던 봉암사 결사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2년 조계종에서 종립특별선원으로 지정하고 지금까지 산문을 닫고 서출동류하는 30리 계곡이 흐르는 봉암용곡 골짜기에 인적을 끊고 ‘살불살조’의 수행가풍을 떨치고 있는 봉암사의 수행정신은 오늘도 꿋꿋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철 큰스님께서 묘엄 스님에게 “그때 그때마다 새로운 불교의 활력을 되살린 곳이 바로 이 봉암사란 말이다.” 고 다짐 주셨듯이 종단의 큰일이 있을 때마다 청정가풍의 수행심으로 종단을 크게 지켜주고 있는 곳이 봉암사 종립선원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봉암사 대중공양은 올해 들어서 제일 추운 날을 잡은 셈이 되었습니다. 따뜻한 남쪽 부산에 사시는 신도님들이라 추운 날씨를 걱정했는데 모두들 튼튼히 무장하고 오셔서 잘 견디고 계셨습니다. 오후 1시에 적명 큰스님께서 45분 가까이 귀한 법문을 해주시고 대웅보전 앞마당까지 오셔서 대중들과 사진찰영에도 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신도님들은 마애불을 친견하러 종종걸음으로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대중들과 함께 해주신 적명 스님과 원택 스님 

 

‘봉암사의 꿈’이라는 성철 큰스님의 글씨를 떠올리며 봉암사 태고선원에서 정진하시는 수좌스님들은 선배스님들이 그렇게 바라셨던 정법안장을 갖추시어 종단과 나라의 큰 동량이 되실 것을 불보살님 전에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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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택스님
본지 발행인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백련암에서 성철스님과 첫 만남을 갖고, 1972년 출가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조계종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도서출판 장경각 대표, 부산 고심정사 주지로 있다. 1998년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 1999년 제10회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환경조형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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