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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너무 매달려 문제? 너무 매달리지 못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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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  2016 년 3 월 [통권 제35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4,51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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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거 해제 특별 인터뷰 

조계종립 특별선원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날 봉암사를 참배했었다. ‘뼈 속을 파고드는 추위’를 실감하고 산을 내려왔던 기억이다. 한 달여 만에 다시 길을 나서는데 이번에는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린다. 라디오 음악도 비와 관련된 노래뿐이다. 심지어 ‘봄비’라는 노래까지 들리니, 분별심인지 괜히 봄을 기대하는 마음까지 생긴다.

 

희양산의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를 통해 봉암사가 멀지 않았음을 느끼곤 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짙은 안개 때문에 희양산은커녕 몇 미터 앞도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봉암사에 왔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를 세웠다. “수좌(首座)스님 친견하러 왔습니다.” 문을 지키는 거사님에게 신원확인(?)을 받고 나서야 희양산문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경내 역시 안개가 자욱했지만 봉암사는 봉암사였다. 모든 것이 반듯해 보였다. 경내를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도 우렁찼다. ‘종립(宗立)’ 선원의 기상(氣像)이 빗속에서도 어김없이 느껴졌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수좌 적명(寂明) 스님을 뵙기 위해 동방장(東方丈)실로 갔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인지 대중공양을 올리러 온 불자들과의 차담이 계속되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한 결의(?)를 다질 겸 대웅전으로가 108배를 올렸다. 몸과 마음에 긴장이 생겼다.

 

진짜 어른의 역할

 

마침 불자들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동방장실을 나오고 있었다.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고 나왔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2009년 2월 스님이 봉암사의 ‘조실 격 수좌’로 추대됐을 때부터 여러 차례 뵙고 많은 말씀을 들었지만 막상 스님 방에 홀로 다시 앉으니 또 새롭다. 

“이번 철에는 61명의 대중이 함께 살았습니다. 지난 여름에는 70명쯤 살았는데 이번 철에는 성적당(惺寂堂) 보수공사를 한다고 대중이 좀 더 줄었습니다. 그래도 대중 모두가 열심히 정진하고 있어 분위기는 더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한 겨울 봉암사 풍경 

 

말씀을 들으며 궁금한 것이 생겼다. 안거 때면 보통 90명 이상이던 대중 숫자가 많이 준 것이다.
“봉암사 자체 내규(內規)를 지난 여름부터 시행하고 있어요. ‘제1조 간화선 수행자만 방부를 들일 수 있다’를 비롯해 모두 9개 조항이 있습니다. 내규를 시행한다고 공표했을 때 대중 숫자가 50명도 안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왔어요. 사소한 내용일 수 있지만 규제에 상관없이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적명 스님은 봉암사에서는 간화선 수행을 우선에 두지만 평소 스님들이나 불자들의 개인 수행으로 위빠사나나 다른 수행법을 배격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적명 스님은 수좌 소임을 맡을 때부터 태고선원 서당 큰방에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을 했다. 몇 년간 어김없이 대중 속에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는 허리가 아파 정진 시간을 좀 줄였다. 사실 78세에도 대중들과 같이 정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안거 때는 새벽과 저녁 정진에만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수좌로서의 책임까지 놓은 것은 아니다. 공부를 막 시작한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공부 점검을 계속 하고 있다.
“안거의 절반이 지나면 첫 보름동안 3인 1조로 대중이 석참(夕參)을 했습니다. 또 그 다음 보름은 자율 석참을 했어요. 그래도 묻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마지막 보름동안 시간을 잡아 면담을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하.”

 

주로 무슨 질문을 받느냐고 여쭙자 “공부 얘기가 많다.”고 스님은 귀뜸했다.
“자기가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화두가 잘 안 들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더 화두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 등 실참(實參)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공(空)과 연기(緣起)와 같은 교리를 묻는 사람도 많아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자세히 얘기를 해 주려 합니다.”

 

간화선 수행자들 사이에서 ‘점검’이 사라졌다고 하는 말들이 많지만 봉암사는 예외였다. 이렇게 점검이 가능한 것은 적명 스님이 든든한 산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님이 선원의 어른으로서 동안거를 마치는 대중들에게 가장 당부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적명 스님에게 인사를 올리는 불자들 


 

“나이들은 중이 젊은 사람들한테 당부할 일이라면 정진 열심히 하라는 얘기밖에 할 것이 없어요. 예전에 해인사 일타 스님이 선방에 다니면서 제방의 어른 스님들에게 여쭈어 보았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제일 하고 싶냐 고요. 그랬더니 노장님들이 하나 같이 정말 죽을힘을 다해 정진을 하고 싶다고 하더래요. 저도 나이가 들어보니 젊었을 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봉암사든 어디든 서 있는 곳에서 항상 열심히 수행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터뷰는 선원 안팎의 현안으로 이어졌다.

 

깨달음은 불이(不二)

 

먼저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깨달음 얘기부터 꺼냈다. 

“깨달음은 깨달음입니다. 하하. 깨달음의 내용은 불이(不二)입니다. 연기(緣起)는 공(空)입니다. 공(空)은 중도(中道)이고 불이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이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사들은 이것을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말씀하셨어요.

 

깨닫고 난 뒤에는 정서적으로 자유로워집니다. 온갖 감정에서 해탈하는 것이에요. 또 지적인 장애에서도 벗어납니다. 깨달은 이들의 특징을 들자면 자비심(慈悲心)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이는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자대비(大慈大悲)로 표현됩니다.”

 

스님은 깨달음이 불이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깨달음이 문자로만 남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최근 벌어진 깨달음 논쟁에 대한 생각도 전했다.
“최근에 현응 스님이 한 번 다녀갔습니다. 현응 스님은 자신이 말한 ‘이해’가 관용적으로 쓰이는 그 이해가 아니라고 해요. 반야(般若)의 다른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현대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표현으로 이해를 썼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특별히 잘못된 것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언어 선택에 오해의 소지가 좀 있었다고 할까요?

 


적명 스님이 원택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단순한 이해라는 것도 즉, 지적인 이해라는 것도 사실은 교학적 입장에서는 가끔씩 써오던 표현입니다. 보조 스님이 깨달음의 과정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 ‘체무생사(體無生死)’, ‘계무생사(契無生死)’, ‘용무생사(用無生死)’가 있다고 하시면서 ‘지무생사’ 즉 ‘이해’를 말씀하셨거든요. 이해라는 것이 깨달음의 한 과정이라고, 깨달음을 위한 준비의 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고 하면 현응 스님이나 수불 스님 모두 어렵지 않게 접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님은 한국불교가 깨달음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오히려 깨달음에 제대로 매달린 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불교라는 종교는 깨달음이 있기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깨달음 없이 불교는 있을 수 없어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교진여를 비롯한 5비구를 만났습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아마 내려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불교는 깨달음에 집중하지 못해서 탈입니다. 진력하는 게 왜 허물인가요? 『법화경』‘화성유품(化城喩品)’에 나오는 대통지승여래는 깨닫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해 십겁의 세월 동안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에 평생을 거는 것을 왜 탓합니까? 오히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부처가 나오게 하자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옛사람처럼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중을 위한 좋은 일은 종교와 관련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깨달음에 가장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간화선(看話禪)이라고 강조했다.
“간화선은 구조적으로 깨달음으로 가는 최고의 길입니다. 화두를 드는 것은 능소(能所)가 끊어지는, 그야말로 상대성이 끊어지는 깨달음으로 바로 들어가는 특별함이 있어요. 특별함이 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수행의 주류가 된 것이고 그 전통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간화선에 대한 오해는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발생합니다. 어떻게 보면 쉽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어렵기도 한 것이 간화선입니다. 일상에서 어떤 일에 의심을 갖게 되면 해답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합니다. 간화선도 바로 그런 원리입니다.


간화선이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화두에 의지하는 점이 있긴 합니다만, 꾸준하게 한다면 정진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깨달음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서로 격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깨달음을 배격해서는, 깨달음을 이루는 사람이 배출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적명 스님은 종단 주변의 범계(犯戒)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았다. 스님은 특히 스님들이 돈을 만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
“수행은 욕망의 절제를 말합니다.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속인보다 더 욕심이 많다고 스님들이 욕을 먹습니다. 스스로 수행자가 아님을 드러내고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삽니다. 스님들에게 욕심을 일으키게 하는 장본인이 바로 돈입니다. 스님들 손에서, 특히 비구 손에서 돈이 떠나게 해야 합니다. 수행자는 열심히 정진해서 사회의 존경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부(富)까지 가지려하니 속인보다 더한 속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스님은 선방 문화가 바뀌는 것에 대해서는 시간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진단했다.
“예전 선방은 지계(持戒) 관념도 없었고 무식(無識)을 자랑하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 해인총림이 생기면서 수좌들이 공부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철 스님이 ‘백일법문’을 하면서 선방 지대방에서도 체용(體用)이 어떻고, 쌍차쌍조(雙遮雙照)가 어떻고,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어떻고 하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전에는 한가하게 이런 저런 주변의 얘기나 하는 정도였거든요. 토굴 문화나 각방 문화 같은 것도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다만 선방의 변화가 항상 수행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은 명심했으면 합니다.”

 


대중공양을 올리러 온 백련암 불자들에게 법문을 하고 있는 적명 스님의 모습 

 

한국불교의 선원을 대표하는 어른답게 스님은 수행과 종단 문제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밝혔다. 말씀을 들으면서 스님에 대한 몇 가지 풍문(?)에 대한 사실 확인을 하고 싶어졌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기계체조 선수 출신이다 등등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소문들을 확인하기 위해 숨도 돌릴 겸 출가 인연을 여쭈기 시작했다. 출가 인연 속에 오늘날의 적명 스님이 그려져 있었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한 줌 흙으로 남는 인생인데…”

 

“저는 대입 재수를 하다가 21살에 출가를 했습니다. 중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다가 갑자기 출가를 했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말썽꾸러기였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시작해 고3때는 육사 입학시험에 지원할 정도는 됐어요. 당시 육사 경쟁률이 50대 1, 60대 1 할 때였는데, 필기는 붙고 2차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재수해서 육사에 합격해 복수(?)하고 보란 듯이 다른 대학에 가려고 했는데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하하. 기계 체조도 취미삼아 했지,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출가 전 스님은 출가자들을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 같은 모습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홀로 대입 공부를 하던 중 중학교 때의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불교단체에서 신행 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그 친구가 부처님에 대한 얘기를 해줬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분이고 뭐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그런 분이 왜 계속 살아 있으면서 가르침을 펼치지 않고 돌아가셨느냐고요. 그랬더니 친구는 부처님은 욕망을 버린 분이다, 삶에 대한 욕망도 없었고, 죽음을 기피하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통달했기 때문에 죽음 따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친구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대학에 가기 위해 열 몇 가지 과목을 공부하는데 부처님처럼 모든 것에 통달하면 굳이 공부를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잠시 들긴 했습니다. 하하.”

 

처음에는 농담처럼 들었던 친구의 말이 계속 가슴에 남아 있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분이고 뭐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다.’ 그래서 출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혼자 한라산에 올라 며칠씩 고민하기를 여러 번. 몇 개월이 훌쩍 지났다. 결심이 섰다.


“육사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나서는 원자력 공학을 공부해서 교수가 되는 것이 당시의 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도 결국 한줌 흙으로 다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결심을 했어요. 부처님처럼 진리를 찾는 사람이 되어 보자고요. 부처님이 되지 못해도 후회를 할 것 같지는 않았어요.”

 

출가 결심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어머니의 대답은 “네가 출가하면 나는 죽는다.”였다. 스님은 어머니의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무덤 만들어 놓고 출가하겠습니다.” 아들의 강경한 뜻에 어머니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스님은 출가를 결행해 부산 범어사로 갔다.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범어사 객실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거기서 만난 스님이 나주 다보사행을 추천했다. 그렇게 인연이 이어져 결국 우화 스님을 은사로 수행자가 되었다.

 

스님은 전국의 선방을 다니며 공부했다. 또 토굴에서도 짧지 않은 시간동안 정진했다. 스님이 겪은 총림 선원의 풍경은 어땠을까?
“조계총림 송광사는 아마 총림 중에서 제일 보수적인 가풍 같습니다. 여법하게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해인총림은 조계총림보다는 조금 자유로운 것 같고요. 그래도 선사(禪師)들이 많이 계셔서 대중들을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영축총림 통도사는 총림이 되기 전에 몇 철 살았어요. 극락암 호국선원에서는 거사님들과 함께, 통도사 보광선원에서는 보살님들과 함께 정진했어요. 재가자들과 같이 있다 보니 함부로 졸 수 없었습니다. 하하.”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의 많은 선지식(善知識)들을 가까이에서 모시기도 했다.
“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분이라고 하면 성철 스님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교(禪敎)에 두루 능통했고 총림을 만들어 선방을 일신시켰습니다. 서옹 스님은 공부 얘기만 하던 분이었어요. 보살행으로는 지월 스님을 따라갈 분이 없었고, 경봉 스님이나 춘성 스님은 뭔가 특별함이 있던 분들입니다. 법문하는 것을 보면 전강 스님 같은 분이 없습니다. 향곡, 설봉 스님 등도 기억에 남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불자와 국민들이 좀 더 쉽게 수행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여쭈었다. 스님의 답은 수행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행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에요. 사람들에게 당부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안 된다, 해야 될 말만 하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안 된다. 해야 될 일만 하자’고 말입니다. 이 두 가지만 지키면 저절로 수행이 될 것입니다. 수행은 말과 행동을 절제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불쑥 말하고 불쑥 저지르면 안 됩니다. 이 작은 것이 계율의 전부이고 수행의 전부입니다.”

 

곧 이어 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전을 추천해 달라고 청을 드렸다. 스님은 『금강경』과 『능엄경』을 추천했다.

 


 


“두 경전은 대비되는 경전입니다. 『금강경』은 대승불교의 뿌리이자 선(禪)의 경전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면 끝이에요. 반면 『능엄경』은 왜 공(空)인지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을 해줍니다. 두 경전을 함께 보면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력이 된다면 공(空)과 유식(唯識)을 종합한 인도불교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도 추천해 주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동안의 인터뷰는 흥미진진했다. 불교와 수행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스님에게 스님의 삶과 수행을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고 했다. 스님은 “예전에 많이 보던 책이나 젊었을 때 찍었던 사진 등이 제대로 남겨둔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도 “그래도 신발은 떨어질 때까지 신는다.”며 웃었다.

 

한국불교의 자존심이자 수좌들의 영원한 고향 봉암사가 바로 스님의 물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봉암사를 나왔다.


‘한고추(閑古錐)’란 말이 있다. 닳아서 끝이 날카로우면서 노련한 송곳이라는 말이다. 서슬이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원숙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진짜 수행자를 빗댄 표현이다. 우리 시대의 선지식 적명 스님에게 ‘한고추(閑古錐)’란 말이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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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주
백련불교문화재단 부장. 현대불교신문 기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월간 <불광> 기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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