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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오래된 미래]
대승불교의 삼삼매해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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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스님  /  2018 년 4 월 [통권 제60호]  /     /  작성일20-05-29 12:25  /   조회5,18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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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은 대승불교가 부파불교의 전통적인 실천과 무관한 장소에서 발전한 새로운 불교가 아니라 전통적인 수행법을 진지하게 실천했던 일군의 수행자들 사이에서 발전된 불교라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한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대승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 지수 백 년 동안 대승불교는 독립된 교단 없이 발전되었으며 보살도 수행자의 학파적 정체성은 상당한 기간까지 아비달마의 학파 소속성에 따라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승려들의 생활방식과 믿음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수계전통으로, 이를 규정한 율장의 차이가 각 학파가 부파로 분열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이 연구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대승불교와 아미달마 불교의 연속성은 교학뿐만 아니라 수행법에서도 발견된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성문의 위계를 중심으로 한 부파불교의 수행론과 보살의 덕목과 위계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의 수행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대승불교에서도 선정 수행이 초기불교 못지않게 강조되었는데, 구마라집의 주장대로 성문도와 보살도 선정 수행 중에서 구체적으로 행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대승경전에 종종 나타나는 전통적인 수행항목인 염처·선·수념 등에 대한 설법과 다양한 이름의 삼매, 그리고 선이 보살의 기본적인 실천항목인 육바라밀의 하나로 확립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수행의 배후에 있는 정신적 태도와 그것에 부여한 의미이다.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삼매는 초기불교에서 발생하여 부파불교 시대에 적극적으로 재해석된 수행론으로, 삼삼매 개념의 변화는 대승불교의 중요한 개념적 발전인 “공”이 수행, 특히 삼매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말해, 대승불교가 선정 수행에서 공의 행상을 실체적으로 파악하는 아비달마적 관점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무엇 때문에 삼마지(samadhi)라 하고 삼마지란 바로 무슨뜻인가? 세 가지 인연 때문에 삼마지라 한다. 첫째 평등하기 때문이요, 둘째 거두어 지니기 때문이며, 셋째 서로 비슷하게 상속하기 때문이다. 평등이란, 이를테면 무시(無始) 이래 번뇌와 악행, 사견과 전도 때문에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한편으로 치우쳐 왜곡하여 전변하므로, 이 선정의 힘으로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경계에 대하여 정직하고 평등하게 전변하게 한다. 그러므로 삼마지라고 한다. 거두어 지닌다는 것은, 이를테면 무시 이래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경계로 치달아 흩어지므로 이 선정의 힘에 의해 방편으로 거두어 지니게 하여 한 경계에 머무르게 한다. 그러므로 삼마지라고 한다. 서로 비슷하게 상속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무시이래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선·염오·무기 등 서로 다른 종류가 상속한 것이므로 이 선정의 힘으로 앞뒤가 한 종류가 되어 오직 선만 상속한다. 그러므로 삼마지라고 한다.

 

삼매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경계를 따라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도록 한 곳에 평등하게 머물게 하며 번뇌와 악 등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여 경계를 정직하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뿐만 아니라 선정만이 마음과 마음작용의 흐름 속에 계속 머물도록 작용한다. 이렇게 한 경계에 대해 평등하고 선한 마음이 지속되면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대지도론』에는 “이 세 가지 지혜가 선정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이는 미친 지혜로서 많은 삿된 의혹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만일 선정에 머무르게 된다면 모든 번뇌를 깨뜨리고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 [……] 또 다시 모든 선정 가운데서 이 세 가지 법이 없으면 삼매라 하지 못하거니와 [……] 도리어 물러나서 생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삼삼매가 없이는 생사의 윤회와 의혹에서 벗어나 실상을 깨닫는 것이 불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소품반야바라밀다경』 제7권 제18 「항가제바품(恒伽提婆品)」에서는 삼삼매해탈문 중 공삼매는 중생상(衆生相)을, 무상삼매는 아상(我相)을, 그리고 무작삼매는 범부의 네 가지 전도상(常·樂·我·淨)을 끊고 터득하는 선정의 경계로 설명하고 있다.

 

대승의 삼해탈문은 고제 등의 네 법 모두 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허망하며 실체가 없으며 자성이 있지 않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선정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공과 같은 마음의 행상을 궁극적 진리의 세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방편이라고 보아야 하며, 공 또한 방편이므로 선정의 경계에 들어도 결코 실제를 증득하지 않고 경계에 매이지도 않을 것을 권고한다. 『대지도론』 제94권에 “사제가 평등하면 이것이 곧 열반이니 고제의 소멸이나 도제의 소멸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아비달마의 삼해탈문에 대한 대승불교의 비판적 관점은 다음과 같다. 사제(四諦)는 연기에 의해 발생하고 소멸하므로 그것을 대상화하여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상화된 것은 우리가 추론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또한 사제를 관찰하기 위해 마음속에 떠올리는 공과 같은 행상은 무아·무상과 같이 법(dharma)의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즉 법이 실제로 있고 그것의 공통된 특징인 공·무아·무상 등의 16행상이 있을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제법의 공성을 주장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개념이다.

 

또 한 가지 수행 중 발생하는 문제는, 공과 같은 행상에 의해 대치해야 할 번뇌가 마음속에 항시 있으며 그것을 제거해야 열반에 들 수 있다는 생각이다. 번뇌가 연기하는 것이라면 마음속에 존재하는 번뇌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로 있지도 않은 번뇌를 제거하고 그렇게 해서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오히려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이고 깨달음을 저해할 뿐이다.

 

대승불교 수행관에 따르면, 아비달마처럼 현상세계 이면에 이를 존재하게 하는 법이 있으며 그 법의 특성에 의해 지혜의 측면으로 사제를 관찰하고 이에 의해 번뇌가 제어되어 완전히 소멸하는 평정의 선정상태를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깨달음과 무관하다. 오히려 ‘진리로서의 사제’와 ‘사제를 관찰하는 공과 같은 행상’과 ‘제거해야 할 번뇌’가 실제로 있지 않으므로 그것들은 공하여 유동적인 것이며 임시로 세워진 가변적인 것이라 직시해야 한다.

 

아비달마적 시각에서 삼해탈문은 출세간을 위한 무루(無漏)의 선정이고 사제를 대상으로 하며 이 선정법에 의해 얻어진 경계를 열반이라 생각하지만, 반야경에서는 이것들은 단지 언어개념의 실체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언어개념이란 결국 임의적인 사회적 합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실제적인 대상을 갖지 못한다고 본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삼해탈문는 선정수행의 결과로 나타나는 선정의 경계를 실재의 세계로 보지 않고 항시 매 순간 연기하는 사태로 간주하고 조망하라고 주장한다. 『대지도론』 제3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행할 것을 이야기한다.

 

문) 삼해탈문에 들게 되면 곧 열반에 이른 것인데 이제 어찌하여 공·무상·무작으로써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지날 수 있다고 하시는가?

 

답) 방편의 힘이 없기 때문에 삼해탈문에 들어가면 곧장 열반을 취하는 것이다. 만일 방편의 힘이 있다면 삼해탈문에 머물러서 열반을 보아도 자비의 마음 때문에 능히 마음을 바꾸어 도로 일으키나니 [……] 이 보살은 비록 열반을 본다 하더라도 머무르지 않고 곧장 지나가 다시금 큰일을 기약하나니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그것이다.

 

 “지금은 바로 (지혜에 의해) 살필 때이지 바로 증득할 때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만일 이 두 지위를 지나면 모든 법이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음을 알게 되니, 바로 그것이 아비발치의 지위이다. 아비발치의 지위 안에 머물러서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진리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또 보살은 삼해탈문에 머물러서 사제(四諦)를 관찰하여 이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알고서 곧장 사제를 지나 하나의 진리[一諦]에 들어가나니, 이른바 모든 법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대승불교의 삼해탈문은 세간과 출세간을 아우르는 선정이며 모든 법의 실상을 대상으로 하며 이 선정법에 의해 얻어지는 경계를 열반이라 보지 않고 그 역시 공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성을 연기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는 한 올바른 삼매의 상태에 들 수 없으며 깨달음에도 도달할 수 없다. 이처럼 모든 법이 불생불멸의 이치임을 알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 것이 진정한 대승보살의 삼해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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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법스님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운문사 승가대학을 마치고 10년간 강사로서 학인을 지도했다. 경전 연찬을 하는 틈틈이 제방에서 정진했으며, 서울대와 동국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과 대안연구공동체 등에서 미학, 명상, 불교를 강의해오고 있다. 2016년 미르문화원을 열고 그곳에서 은유와마음연구소를 맡아 운영한다. 새로운 형식의 불교모임인 무빙템플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으며, 이 밖에도 (사)한국명상지도자협회 이사와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은유와 마음』, 『미술관에 간 붓다』, 『선종과 송대사대부의 예술정신』 등이 있으며, 「무지한 스승으로서의 선사」, 「『선문염송』의 글쓰기-정통과 민족적 정체성의 지향」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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