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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고해를 건너가는 나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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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3 년 12 월 [통권 제8호]  /     /  작성일20-05-29 14:11  /   조회5,941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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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 

 

“우린 모두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미국에서 한 때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스웨터』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의 저자 글렉벡의 말처럼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온통 고통으로 가득 찬 바다라고 했으니 행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행복해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땅에서 버텨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해 ‘최상의 좋음’이라고 정의했다. 고통으로 가득 찬 험난한 바다에서 최상의 좋음이란 바로 그 고통이 사라진 상태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고통의 바다에서 신음하는 중생들이 행복을 꿈꾸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행복에 대해 다양한 측면을 말할 수 있겠지만 성철 스님은 두 가지로 분류했다. 하나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행복이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상대적이고 유한한 행복이라면, 종교가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행복이다. 종교의 현상적인 모습은 비록 다를 수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이 성철 스님의 입장이다. 즉,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를 넘어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 그리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표라는 것이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는 나고 죽는 생멸(生滅)의 세계를 말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중생들의 삶을 말한다. 우리의 삶과 현실 속에서는 설사 운이 좋아서 행복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상대적이고 유한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 자체가 매우 짧고 유한하기 때문이다. 반면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는 모든 속박과 구속에서 벗어난 해탈(解脫)의 세계이자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언덕〔此岸〕에서 모든 속박과 고통이 사라진 저쪽 언덕〔彼岸〕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다음 생이 닥쳐올 만큼 짧고 유한하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이룩한 것들은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늙음을 막을 수는 없으며, 아무리 명예가 드높아도 질병의 고통을 피할 수 없으며,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죽음의 고통을 이길 수는 없다. 

 

하늘의 극락과 마음의 극락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잠시 머물다 사라져 가는 무상(無常)한 존재들이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라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금언은 인간의 삶은 결국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는 유한한 존재임을 극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모든 종교는 이와 같은 인간의 유한성을 뛰어 넘어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절대무한의 세계를 추구한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현실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종교에서는 현실을 초월해 있는 또 다른 세계를 설정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당(天堂)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영원한 행복은 지상이 아니라 ‘하늘의 집’에서 가서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천당은 살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죽어서 가는 곳이다. 삶은 유한한 세계의 현상이므로 유한한 세상과 결별해야만 영원한 세계로 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테면 죽음은 유한한 세계의 삶을 끝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인 셈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제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현실 너머의 세계에서 절대적이고 영원한 행복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극락이나 천국에 가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천국이란 현실세계의 유한성에 대한 쓰린 아픔을 보상받고 싶은 인간의 기원과 바람이 빚어낸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불교에서도 이 같은 주장은 존재한다. 궁극적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극락(極樂)은 우리가 사는 이곳이 아니라 아득한 서쪽 하늘 어디쯤에 있다는 정토설이 그것이다. 정토경전에 따르면 극락세계는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십만 억 국토를 지난 곳에 있다고 했다. 십만 억 국토란 유한한 세계의 질서가 끝나는 어떤 초월적 공간을 의미한다. 이처럼 현실세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이곳의 삶이 끝나는 곳에 극락과 천국이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제는 그와 같이 아득한 곳에 있는 유토피아에 어떻게 갈 수 있는가이다. 천국과 극락이 저 멀리 하늘나라에 있다는 입장에서 보면 그곳은 인간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다. 십만 억 국토 너머의 세계는 유한성을 벗어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락이나 천국은 나를 초월한 힘, 즉 타력(他力)의 힘을 빌어야만 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 힘은 종교에 따라서 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다른 힘을 빌어서 가는 극락이나 천국은 이

 

땅이 아니라 저 아득한 곳 어딘가에 있기에 타방정토(他方淨土)라고 불렀다. 현실세계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 있는 유토피아라는 말이다.

 

주술적 신념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천당이나 타방정토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지혜가 성숙될수록 그런 주장에 대해 회의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주술의 정원에서 춤을 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행복을 찾아서 가야할 유토피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가야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불교의 대답이 바로 유심정토(唯心淨土)이다. 영원한 행복이 있는 극락이란 아득한 우주 저 멀리 어느 귀퉁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고해를 건너가는 나침반

 

성철 스님은 불자가 가져야할 바른 믿음〔正信〕은 영원한 행복이 있는 극락이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음을 철저히 믿는 것이라고 했다. 반대로 영원한 행복의 집이 아득한 저 우주 어디에 있다고 믿는 것은 삿된 믿음〔邪信〕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타방정토를 말씀하는 경전이 분명히 있고, 그런 믿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정법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이자 가설(????說)이라는 것이다.

 

성철 스님뿐만 아니라 옛 조사스님들도 한결같이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는 말 이외에는 모두 다 삿된 믿음이라고 했다.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알고 믿는 것이 바른 법〔正法〕이라는 것이 선종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와 같은 확고한 믿음으로 자기 마음을 깨달아 부처를 이루는 것이 불자의 바른 믿음이고 실천이다.

 

결국 고해의 풍랑을 넘어 영원한 행복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나침반은 초월적인 타자의 힘이 아니라 나 자신의 자각이며, 우리가 가야할 유토피아 또한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라는 것이다. 극락과 천국은 가야할 먼 곳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 있는 곳이다. 그래서 틱낫한 스님은 “We have arrived at home.”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가야할 그 고향, 궁극적 목적지에 이미 도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한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나침반은 아득한 우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을 가리키고 있어야 한다. 

 

“사람 사람마다 나침반이 있으니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 본래 마음에 있구나. 이전의 잘못된 소견 우습나니 수많은 가지와 잎을 쫓아 밖으로만 찾았구나!” 

 

왕양명(王陽明)은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는 나침반은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늘 밖을 향해 방황해 왔다. 황금을 찾아 질주했고, 권력을 쫓아 갈팡질팡해 왔고, 아득한 우주 어느 곳을 갈망해 왔다. 그렇게 밖으로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어 거꾸로 질주하는 삶이 중생들의 뒤바뀐 삶이다. 하늘과 땅 만유의 근본이 나의 내면에 있음으로 밖이 아니라 내면을 향해 가는 것이 바른 길이다. 왕양명은 그와 같은 내면에 대한 눈뜸이야말로 참다운 행복으로 가는 것이며, 자신의 내면을 바로 아는 것이 무한한 보배창고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보배 창고를 깨닫지 못하고 남의 집 앞에서 밥을 비는 거지 노릇을 자처해 왔다. 영원한 행복이 있는 극락에 가고자 한다면 극락이 밖에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가야할 궁극의 목적지는 마음 밖에, 이 현실 밖에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불자는 스스로에게 절대무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기 스스로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계발하여 영원한 행복을 찾으라는 가르침이다. 그것이야말로 고해를 벗어나 극락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내면에 있는 보배창고의 문을 여는 것이며, 극락으로 인도하는 나침반을 따라가는 것이다. 다 같이 내 속에 있는 나침반을 발견하고 그것이 지시하는 곳을 따라 항해하여 마침내 영원한 행복의 세계에 이르는 것이 불교를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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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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