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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론학 강설]
섭산의 삼론학 시조 승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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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  2019 년 12 월 [통권 제80호]  /     /  작성일20-05-22 08:32  /   조회5,26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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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불교학자·번역저술가

 

9.승전僧詮과 그 문하

 

1. 섭산의 삼론학 제2조 승전

 

승랑에게 수업하고 삼론학을 이어 받은 섭령상승의 제2조는 승전僧詮이다. 섭산攝山 서하사棲霞寺에 거주하던 승랑을 섭산대사攝山大師, 서하대랑사棲霞大朗師라고 호칭한데 대하여, 승전을 산중사山中師, 산중법사山中法師, 산중대사山中大師라고 칭하였으며, 섭산의 지관사止觀寺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지관사止觀師, 지관전사止觀詮師라고도 칭하였다. 승전은 섭산 삼론학의 제2조일 뿐 아니라, 학파 종파에 어울리는 교세를 승전에 이르러 비로소 구축하여, 삼론학 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인물이다.

 

2. 2인人의 승전설說

 

그러나 승전의 생애는 자세하지 않다. 『고승전』 제7권에 「승전전僧詮傳」이 수록되어 있으나, 그 내용이 섭산 지관사의 승전과 부합하지 않는 바가 많아 의심을 받고 있다. 그 전기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

 

“승전의 속성은 장張씨로, 요서遼西 해양海陽(河北省) 출신이다. 젊은 시절 연燕과 제齊에서 유학遊學하고, 외학外學을 두루 배우고 삼장三藏을 잘 습득하여, 북토北土 학자學者의 종사로 호칭되었다. 나중에 남토로 건너와 경사京師에 머물며 강설을 성대하게 행하여 그 교화가 강남을 흡족하게 하였다. 이후 여러 사람들의 간청으로 오吳의 한거사閑居寺에 거주하고, 호구산虎丘山에도 휴식하였다. 또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여항余抗에 방현사方顯寺를 건립하여 주지住持가 되어주기를 간청하여, 대중을 통솔하여 거주하며, 근면하게 수행하여 실명하기에 이르렀다. 만년晩年에 임안현臨安縣을 다니며 동공조董功曹의 집안에 머물러 지내다가 병이 들어 임종하였다. 임종할 무렵, 제자 법랑法朗이 꿈에 여러 사람이 봉지捧持하는 태거台車를 보고 어디 가느냐고 묻자, 전법사詮法師를 맞이한다고 답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다음날 아침 승전이 천화遷化하였다고 한다.”(주1)

 

이러한 내용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 제자 법랑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섭산의 승전僧詮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 남토로 건너온 이후의 행적은 다른 사람의 경력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학계에서는 『고승전』의 승전을 섭산의 승전과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보고 거의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전기의 마지막에 거론된 법랑의 꿈 얘기는 전기를 기록한 누군가가 두 명의 승전을 혼동하여 동일시한 결과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부에서 지적하기를, 섭산의 승전에 대하여 확실한 것은, 양무제가 승랑에게 삼론의 대의大義를 학습하라고 보낸 열 명의 학승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과, 승랑 한 사람에게 경도되어 섭산에 머무른 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주2)

 

3. 승전의 대략적인 생애

 

그러나 『고승전』 의 「승전전僧詮傳」을 제외하여도, 연관성 있는 다른 문헌 자료들에 부분적으로 언급된 기록을 통하여 승전의 수학과 강론 학풍 등을 어느 정도 더 알아볼 수 있다.

 

① 승전의 개인 교습
양무제가 천감天監 11년(512)에 승정인 지적智寂을 포함하여 열 명의 학승들을 섭산에 보내어 승랑에게 삼론학을 학습하게 하였고, 그 중 오직 승전만 학업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확실한 사항의 하나이다. 그러면 어떻게 수업하였던 것일까? 열 명이 모두 함께 학습하였는데 승전이 우등이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홀로 특별 수업이라도 받았던가?

 

다른 저서에 부분적으로 인용되어 있는 주석서 『약술略述』에는 다음과 같이 승전의 수업과정이 보다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양나라 무제武帝(502-549재위)는 승랑의 명성을 듣고, 조칙을 내려 학승을 섭산에 보냈는데, 그 열 명은 모두 성실학파에 속하여 대부분 소속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승전만이 신오神悟함이 남들과 달라 전심으로 승랑의 법문을 듣고 익혔다. 승전이 깨우침을 얻어 종래의 교학을 개량한 것을 알고서 승랑은 일일이 논의의 취지를 더욱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과연 승전은 승랑에게 개인 교습을 받았던 것이다. 승전은 원래 소속인 성실학의 범주를 벗어나 열린 자세로 삼론학에 귀를 기울이고 학습하여 승랑에게 인정을 받았고, 나아가 승랑에게 개인적인 교습을 받아 승랑이 터득한 학설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 결과 법랑 길장 등을 거쳐 승랑의 삼론학설 십 여 가지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② 승전의 강론과 학풍
승전은 승랑으로부터 학습한 『대지도론』 『중론』 『백론』 『십이문론』과 『화엄경』 『대품경』 등을 주로 강론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중론』과 『대품반야경』을 더 중시하였다고 한다.(주3)

 

『화엄경』의 학습과 강론은 이후 제자 법랑을 거쳐 길장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데, 몇몇 학자는 이것을 승랑의 영향이라고 보고 있다. 승랑 이전 구마라집과 그 문하에서 『화엄경』을 특별히 중시하거나 강설하지 않았다. 구마라집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천축의 역경승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Buddhabhadra. 359-429)는 그 문하의 냉대를 받아 혜관 등과 함께 남방으로 가서, 혜엄 등과 함께 60권 『화엄경』을 역출하였다. 그 학습 내력이 분명하지 않지만, 승랑의 『화엄경』 이해는 당시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승전의 학풍은 설법을 너무 많이 하지 않고, 내면적인 수행에 힘을 쏟은 경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 승전이 법랑에게 수업할 무렵의 교시에도 나타나 있다. “현묘한 취지가 드러나는 것은 오직 중관中觀에 있으니, 마음으로 도리를 해석하여 계합하지 못하면, 어떻게 이 청정한 언어에 계합하겠는가. 그리하여 행적을 그윽한 수림에 두어 선미禪味를 상득相得한다.”(주4) 승전은 섭산에 거주하며 좌선삼매 갈은 것을 수행한 것이다.

 

4. 승전의 문하와 4대 제자

 

양무제의 조칙으로 섭산에 파견되어 승랑으로부터 학업을 성취한 이후, 승전의 명성이 멀리 퍼져 수학하러 온 학도들이 오백 명에 이르렀다. 학계에서는 대개 삼론학이 학파 종파다운 교세를 갖춘 것은 바로 이 승전 시대부터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명성을 듣고 사방에서 삼론을 유학遊學하러 온 학사學士들이 소털[우모牛毛]처럼 많았어도, 학업을 성취한 이는 매우 적었다고 한다. 삼론의 학업이 용이하지 않았지만, 이를 성취한 이들은 당대에 뛰어난 지도자로서, 다른 학파 종파의 선구자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수 백명에 이르는 승전의 문도 중에 학업을 성취하여 가장 뛰어난 네 명을 당시에 ‘전공사우詮公四友’라 칭하였다. 그 네 명은 곧 법랑法朗·혜포慧布·지변智辨·혜용慧勇을 말한다.(주5)

 

법랑法朗(507-581)은 승전의 반야삼론학의 학문적인 면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승전을 계승하여 섭령흥황상승의 제3조가 되었다. 흥황사興皇寺에 거주하며 삼론과 『대품경』 『화엄경』을 강론하였다. 현존하지 않지만 『이제소二諦疏』라는 저술도 있었다고 한다.(주6)

 

혜포慧布(518-587)는 승전의 선적禪的인 수행 면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승전 이후 섭산을 맡아 지켰다. 혜포는 당대의 저명한 선사禪師들, 후세에 조사에 해당하는 선종禪宗의 혜가慧可와 천태종의 혜사惠思를 비롯하여 여러 선사들과 교류하며 논의하였다. 혜포는 말년에 보공선사保恭禪師(542-621)를 초빙하여 서하사에 선당禪堂(禪府)을 건립하였는데, 선종을 인접하여 후세에 이르도록 서하사의 도풍道風에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속고승전』의 저자 도선道宣이 칭찬하였다. 보공선사도 혜포에게 삼론을 듣고 익혀, 깊은 의미의 문언에 잘 계합하였다.(주7)

 

지변智辨은 별도의 전기가 기재되지 않아, 생애가 자세하지 않다. 장간사長干寺에 거주하여 ‘장간변공長干辨公’이라 칭하였다. 이름난 제자에 지윤智閏과 혜인慧因이 있어 전기가 남아 있는데, 모두 삼론을 잘 하였고, 지변을 추종하여 정혜定慧를 병용하는 실천적인 면모가 강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전기에 언급된 지변은 당대에 일방一方의 수창자首唱者로 알려졌다.

 

혜용慧勇(515-582)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젊은 시절 영요사靈曜寺의 도칙선사道則禪師에게 선禪을 수학하고, 나중에 승전의 학덕을 흠모하여 지관사止觀寺에 머물렀다.

 

혜포도 여러 선사와 교류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지변과 혜용도 천태의 지의智顗(智者)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구절이 여러 문헌에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있어,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하다.

 

5. 선종 제2조 혜가慧可와의 만남

 

전기에 다르면, 승전의 사우四友 중에 혜포는 중국 선종의 제2조 혜가慧可와 만나 교의를 담론하여 혜가로부터 그 깊은 학식을 인정받았다고 한다.(주8)

 

별도의 연구에 의하면, 혜가의 여러 제자들 중에 화선사和禪師가 있고, 화선사의 제자들 중에 정애靜藹는 저명한 삼론·사론학자였고, 현경玄景은 『대품반야경』 등을 학습하였다. 이와 대조하여 혜포 또한 승랑의 삼론학의 발원지 섭산의 서하사에 선부禪府, 선당禪堂을 건립하였으니, 이 경우만 보아도 삼론학과 초기 선종의 상호 영향이 분명히 드러난다.

 

6. 천태天台 남악혜사와의 교류

 

또한 혜포는 천태 지자대사의 스승 혜사와 3일에 걸쳐 대의大義를 논의하여 혜사로 하여금 탄복시켰다고 한다.(주9) 다른 자료에 의하면, 혜포 외에 지변과 혜용도 천태 지자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혜포가 혜가와 혜사 등 여러 선사들과 만나 논의하였다는 전기의 기록은 간단하고 문장도 짧지만, 그 여운은 가볍게 처리하기 어려울 만큼 지대한 비중으로 다가온다.

주)
(주1) 『高僧傳』 제7권 「釋僧詮傳, (T50, p.369c).
(주2) 平井俊榮, 『中國般若思想史硏究』, 東京 春秋社, 1976, p.272.
(주3) 道宣, 『續高僧傳』 제7권 「釋法朗」, (T50, p.477b).
(주4) 道宣, 『續高僧傳』 제7권 「釋法朗」, (T50, p.477c).
(주5) 道宣, 『續高僧傳』 제7권 「釋慧布」, (T50, p.480c).
(주6) 吉藏, 『二諦義』, (T45, p.86b). “所以山中師手本二諦疏云, 二諦者乃是…”
(주7) 道宣, 『續高僧傳』 제11권 「釋保恭」, (T50, p.512c).
(주8) 道宣, 『續高僧傳』 제7권 「釋慧布」, (T50, p.480c).
(주9) 道宣, 『續高僧傳』 제7권 「釋慧布」, (T50, p.480c-p.48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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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동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용수龍樹의 화엄사상華嚴思想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동국대 불교학과 강사 역임. 동국대에서 『한국불교전서』 제13권과 제14권(『유가사지론기』) 공동 교정 편찬. 고려대장경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돈황불교문헌 공동 연구. 번역서로 『삼론현의三論玄義』와 고려대장경의 한글 번역본 몇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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