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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법문 해설]
대승과 최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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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  2014 년 2 월 [통권 제10호]  /     /  작성일20-05-29 14:18  /   조회5,186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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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과 동구불출 

 

성철 스님은 평생 수행으로 일관한 선승이다. 팔공산 성전암에서 수행할 때는 암자 주변에 철조망을 둘러치고 10년간 동구불출(洞口不出)하며 오직 참선 수행에만 전념한 것으로 유명하다. 해인사 방장에 오르고, 종정으로 추대된 이후에는 법회와 중생교화를 빌미로 더러 도시로 나들이를 할 법도 했지만 한번도 해인사를 떠난 적이 없었다. 스님은 사회가 격변하고 종단안팎으로 갖가지 이슈가 잇따라 터졌지만 세간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런 스님의 행적을 두고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고통으로 신음하는데 스님은 깊은 산 속에서 개인적 수행으로 마음의 평화만을 지향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렇게 비판하는 근거로 드는 것이 대승불교의 정신이다. 즉, 유마 거사는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고 했고, 지장보살은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지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면 성불마저도 포기하겠다고 서원했다. 그런데 어떻게 중생들을 뒤로 하고 수행에만 몰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승불교를 근거로 수행에 전념하는 선승을 이렇게 비판하는 것은 대승의 정신과 선종의 정신을 동일시하는 데서 오는 오해라고 볼 수 있다. 대승의 정신은 지금 바로 보살행을 통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반면 선의 정신은 철저한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를 끊고 생사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대승불교가 보살행이라는 과정으로서의 실천과 삶을 중시하는 전통이라면 선종은 생사해탈하는 깨달음을 중시하는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절속과 은둔의 선종

 

선종은 대승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분명한 차이도 존재한다. 대승은 보살행을 최상의 수행이라고 보지만 선종에서는 중생심으로 하는 이타행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다.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알지 못하면 마치 눈먼 안내자와 같아서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을 오히려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자신의 내면을 먼저 밝히는 수행에 방점을 찍는다. 선사들이 세간에 들어가 중생들의 손을 잡는 대신 오히려 절속과 은둔의 삶을 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선종의 이와 같은 전통은 초조달마 대사가 보여준 절로도강(折蘆度江)이라는 고화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달마 대사는 불법천자(佛法天子)로 불리며 불교를 숭상했던 양무제와 만났지만 미련 없이 결별한다. 그는 화려한 불교국가와 신심 깊은 왕후장상들을 뒤로 하고 한 줄기 갈대를 꺾어 타고 장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다. 그리고 소림사에서 9년간 오로지 면벽하며 몇몇의 제자들에게 도를 전했을 뿐이다.

 


최상승의 길을 위해 선원에서 정진 중인 스님들 

 

달마 대사가 보여준 이와 같은 절속의 삶과 은둔의 수행문화는 초기 선종의 전통으로 자리 잡는다. 초기 선종사를 다루고 있는 『능가사자기』에는 훌륭한 나무는 깊은 산에 있어야 나무꾼의 도끼날을 피해 장차 큰 집을 지을 대들보로 자라난다고 했다. 수행자 또한 깊은 산 속에서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수행에 전념해야 세상을 떠받칠 위대한 인물이 된다고 했다.

 

선의 이런 정신은 천태지의의 저술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지의는 수행의 다섯 가지 조건〔具五緣〕중에서 ‘한거정처(閑居靜處)’와 ‘식제연무(息諸緣務)’를 들고 있다. 한거정처란 세속의 번잡함이 없는 고요한 장소를 말하며, 식제연무란 온갖 인연과 일을 멈추는 것을 말한다. 잡무를 멈추고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닦는 것이 수행의 요체라는 것이다.

 

참여와 과정의 대승불교

 

선종과 달리 대승불교는 보살행이라는 과정이 중시된다.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의 정신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대승불교는 하화중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비록 자신은 고해를 건너가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고통에 처한 중생들을 먼저 건너가게 하겠다는 ‘자미득도 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가 대승의 정신이다. 그와 같은 보살행이야말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최상의 수행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 제시하는 보살행은 부처님께서 전생에 재가자의 신분으로 하셨던 실천들이다. 중생을 향한 자비와 연민에서 나오는 보살행이 부처님의 실천〔佛行〕이었으며, 그것은 곧 부처님의 지위에 오르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 대승의 정신이다. 따라서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부처님이 가셨던 거룩한 길로 우리도 따라 감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불족적(佛足跡)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붓다께서 입멸하신 뒤 붓다를 상징하는 것은 붓다의 발자국이었다. 부처님은 신격화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사표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대승행자들은 부처님의 발자국을 따라 부처님이 가셨던 그 길로 가는 것을 보살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대승행자들에게 부처님의 전생을 기록한 전생담은 중요한 실천지침이 됨은 물론이다. 전생담에는 보살행에 대한 무수한 기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대승행자들은 전생담을 근거로 보살의 실천을 정형화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라는 육바라밀이다.

 

육도만행과 깨달음

 

대승불교에서는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고해를 건너가는 실천〔度〕’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육바라밀을 완전하게 닦는 것을 육도만행(六度萬行)이라고 했다. 여섯 가지의 바라밀행은 부처님이 가셨던 길이며, 불세계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 대승의 정신이다. 반면 선종은 오직 마음을 깨치는 수행의 한 길을 지향하고 있다. 성철 스님 역시 이와 같은 선종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데 『백일법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언어문자를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육도만행을 닦아서 정각(正覺)을 성취하는 것이 어떠냐고 흔히 수좌들이 나에게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전 조사스님들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고 하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갈 것입니까. 육도만행이 보살행으로서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 이것으로는 자기 자성을 깨치지못하는것입니다.”-『 백일법문』상

 

성철 스님은 육도만행이라는 보살의 길이 아니라 철저히 마음을 깨닫는 선종의 정신을 지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혹자는 육바라밀은 부처님이 가신 길이고, ‘피안으로 건너가는 실천이므로 바라밀〔到彼岸〕’이라고 했는데 왜 ‘죽은 송장’에 비유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불교를 넘어 격외도리(格外道理)를 지향하는 선종의 입장이고, 경전의 가르침과는 다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길이고, 조사의 가르침을 수행의 기준으로 삼는 조사선(祖師禪)의 입장이다. 이것은 보살행이 옳으냐, 참선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참여와 보살행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선종이 지향하는 종교적 실천방식이 대승과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와 선종의 차이에 대해 대주혜해 스님은 대승과 최상승이라는 개념으로 구분 지었다. ‘대승이란 보살승’이며, ‘최상승(最上乘)이란 불승(佛乘)’이라는 것이다. 육바라밀과 같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것은 대승의 길이다. 반면 “보살승을 증득한 이후 더 이상 닦을 곳이 없음에 이르러 항상 고요하여 늘지도 아니하고 줄지도 아니함을 최상승”이라고 했다. 그와 같은 최상승이야말로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불승이라는 것이 선의 입장이다.

 

선은 철저하게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겠다는 기사구명(己事究明)의 길이다. 수행을 통해 반야의 지혜를 깨닫겠다는 것이며, 생사해탈하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닫겠다는 다짐, 중생의 한계를 벗어나겠다는 다짐은 이기주의도 아니고, 신비주의도 아니다. 그와 같이 당차고 고독한 도전이 있었기에 원대한 사상이 잉태되었고, 고원한 종교사상이 발전할 수 있었다. 성철 스님도 그런 길을 가고자 했을 뿐이다.

 

보살의 길도 훌륭하고 존경할 일이지만 그것을 이유로 수행자를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참선자는 의단독로(疑團獨路)하고, 염불자는 삼매현전(三昧現前)하고, 간경자는 혜안통투(慧眼通透)하고, 보살행자는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각자의 근기와 방편에 따라 살아가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보살의 길은 그 길대로, 참선의 길은 또 그 길대로 가치가 있다. 불교는 그런 다양성을 포용했기 때문에 마르지 않는 광대한 불법의 바다를 이루었다.

 

결국 육바라밀의 실천으로 대변되는 대승불교의 정신과 마음 닦음으로 대변되는 선종의 정신은 과정과 지향점이 다르다. 따라서 대승불교와 선종의 다름을 드러내고 자신들은 대승이 아니라 최상승이라고 천명한 선승들을 향해 대승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다른 나라 사람에게 대한민국의 법률을 기준으로 잘못을 따지는 것과 같다. 깨달음을 얻겠다고 천명한 선승들에게 현실참여와 육도만행을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선에서 자비란 깨달음을 얻어 생사해탈하고,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는 길을 여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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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을 거쳐 현재 성철사상연구원 연학실장으로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등이 있으며 포교 사이트 www.buruna.org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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