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 주인공의 삶]
독서의 계절, 책 한 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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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혜 / 2014 년 10 월 [통권 제18호] / / 작성일20-05-29 14:38 / 조회7,004회 / 댓글0건본문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요즘 하늘을 보면 애국가 3절이 떠오른다. 추울 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괴롭고 더울 땐 망사 같은 옷도 무겁다. 오온이 고(苦)임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청량한 가을 날씨는 더없는 선물이다. 수행자에게는 도 닦기 좋은 계절, 집 짓는 사람에게는 공사하기 좋은 계절, 설레는 청춘에게는 썸 타기 좋은 계절, 애연가에게는 담배 피우기 좋은 계절이다. 뭘 갖다 붙이든 적합한 계절이지만 ‘가을’하면 역시 ‘독서의 계절’이다. 이어서 ‘마음의 양식’, ‘독서삼매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일상적인 이 말속에 불교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책을 밥으로 표현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불교에서는 오래된 생각이다. 『아함경』이나 『성유식론』을 보면, 라면이나 김밥 같은 음식 말고도 정신적인 밥이 있다고 한다. 좋아하는 것을 접했을 때 느끼는 쾌감, 이번 달에는 원고 마감을 기필코 지켜야지 하는 의지 등이 그것이다. 법문을 듣고 환희작약하는 법희식(法喜食), 선정에 들어 기쁨을 느끼는 선열식(禪悅食)에도 밥 식(食) 자가 붙어 있다. 책에 몰입하면 그것이 삼매이고 책을 읽고 기쁨을 느끼면 그것이 밥이 된다. 중생이 그 힘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간다는 말이다. 독서삼매경도, 마음의 양식도 아마 여기서 나온 말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같은 불교를 하면서도 선가에서는 책읽기를 권장하지 않는다. 계정혜 3학 중에 정(定)을 주로 닦는 사람들이라, 마음을 텍스트로 삼아 직관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독서를 하려면 기억하고 분석하고 상상하는 갖가지 작용이 필요한데 그것이 직관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스승에게 혼쭐이 난 분도 있었고 야단을 맞아가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책벌레도 있었다. 『선림보훈』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황룡 스님이 운봉 스님과 봉림사에서 하안거를 지낼 때였다.
황룡 스님은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언제나 경전을 보고 있었다. 한번은 운봉 스님이 황룡 스님의 책상머리에 다가가서 눈을 부릅뜨고 “그대는 여기서 선지식의 이론이나 익히고 있는 겐가?”하고 꾸짖었다. 황룡 스님은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고는 여전히 경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담당 스님이 처음 진정 스님과 함께 살게 되었을 때 항상 휘장 속에서 불을 켜 놓고 책을 읽었다. 하루는 진정 스님이 책이 도 닦는 데 방해가 된다는 취지로 일장 연설을 하며 꾸짖었다. 담당 스님은 그때부터 책을 버리고 오로지 관을 닦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책 읽는 소리를 듣고 활연히 깨달았다. 읽은 책이 많아서인지 그의 설통을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영원 스님은 경사(經史) 읽기를 좋아하여 밥 먹고 쉬는 사이에도 쉬지 않고 책을 읽었다. 마침내는 책을 다 외워버렸다. 회당 스님이 걱정하면서 꾸짖자 영원 스님은, 천성이 그런 거라고 했단다.
위 세 분은 독서광으로 타고난 경우이고, 세 분을 꾸짖었던 분들은 도를 위해 일부러 책을 피한 경우다. 양쪽 다 부러운 사람들 이야기다. 황룡, 담당, 영원스님처럼 눈을 뗄 수 없고, 손에서 놓을 수 없으면 그것이 독서삼매경이다. 꼭 경전이나 양서가 아니더라도 어떤 책을 그냥 재미로 읽는다면 자연스럽게 삼매경에 빠질 것이고 뇌에 양질의 산소가 공급되어 즐겁게 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냥 재미로’를 봐주지 않는다. 입시를 위해, 업무를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많은 양을 봐야하니 책 읽기가 또 하나의 고통이다. 이 많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비법은 없을까. 가까운 친구 둘에게 물어 보았다.
하나는 주부인데 전업독서가처럼 책을 읽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밑줄 쫙 그어가며 다시 읽어서 책 한 권을 한마디로 요약해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다. 예컨대 유전자에 관한 책을 읽고는 ‘결국 안 되는 놈은 안 된다’라고 요약하는 식이다. 또 하나는 스무 살에 다섯 식구의 가장이 되어 먹고 살기 바빴던 친구다. 이 친구 말로는 ‘모든 책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고, 그 수박 겉도 다 못 핥고 다른 수박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두 사람의 방법은 극과 극이다. 그런데 둘 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돌아가는 세태에 대해, 삼라만상에 대해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준다.
정해진 독서법이란 없는 모양이다. 극과 극이라 해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고전을 많이 읽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 고전이라고 한다. 어렵고 재미없어서 그런 말이 나왔을 테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재탕 삼탕 우려먹어도 맛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또한 고전이다. 고전읽기에 대한 가이드북 중에 그 취지가 가상한 것이 있어 옮겨 본다.
『고전문학 읽은 척 매뉴얼』, 김용석, 멘토르출판사, 2014.
취지 :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독서삼매경에 빠지기 충분한 책이라, 이 가을에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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