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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기도]
성철스님과 나의 3000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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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구  /  1996 년 3 월 [통권 제1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6,56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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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총장 송석구

 

나는 법당에 가서 부처님 앞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조용해진다. 이러한 마음의 평정은 부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라면 다 그러하리라고 믿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부처님은 법당에 계신 것이 되고 부처님은 형상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부처님은 형상이 아니고 ‘이 마음’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 마음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쉽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이쯤 되면 불교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된다. 마음이 부처라고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가 밤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렵다. 그 깨달음이란 논리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저 절이 좋았고, 절에 가면 부처님의 모습이 거룩해 보였고, 나를 어루만져 주는 듯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는 학교 공부가 바빠서 절을 찾을 수 없었다. 특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옆에는 조계사가 있었는데, 그 조계사는 스님들이 단식하고 시끄러운 모습이 보 였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학을 들어가고부터는 방학이 되면 거의 매년 절에 가서 한 달씩 묵으면서 공부를 했다. 그때는 내가 불교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절에서든지 불교대학을 다닌다고 하면 친절하게 받아 주고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도 해 주었다.

 

1959년 겨울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서경수 선생님, 미국 스토니부룩의 박성배 교수님들과 함께 정선 정암사로 공부한다고 떠났다가, 마침 그 곳에서 참선 결재기간이기 때문에 태백산을 넘어 철암의 흥복사로 옮겨 한 달간을 지낸 적이 있다. 태백산은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곳을 간신히 넘어 산 정상의 눈 속에 덮인 무당의 움막집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진수성찬으로 대접을 받기도 했다.

 

부처님이 계신 절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먹고 자는 것은 일단 해결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워 아직도 보릿고개라는 말이 통용될 때였다. 정선 정암사까지 가려면 서울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밤에 도착되는 그런 시절이었다. 여하간 철암 흥복사에서 깍두기와 김칫국으로 한 달을 지내면서도 아침, 점심, 저녁의 예불을 잊지 않고 해왔다. 나는 그 떄 참으로 불성을 만난 기쁨을 맛보았다.

 

여하간 나의 부처님에 대한 접근은 가장 현실적이었고 소박했다. 그때만 해도 대학교 2학년에 지나지 않았고, 나는 불교를 좋아했지만 불교학을 전공하진 않고 있었다. 나는 철학과 학생이었고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1950년대에 유행하던 실존철학에 심취되기도 하고 막연히 철학에의 향수가 지극한 그러한 학창시절이었다. 그리고 불교를 대학 1학년 때 불교학개론이나 문화사를 배웠지만 아직 그 내용에 심취되지 못하고 평범한 불교 탐구자에 지나지 않았다.

 

1962년 여름, 나는 해인사 원당암을 찾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한 그 해였다. 해인사 큰절을 들러 한 달간 묵으면서 공부할 곳을 찾으니 원당암을 소개해 주었다. 원당암은 휴양하러 오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있었다. 내가 해인사와 인연이 있다면 이때가 처음이다. 원당암에서 한 달을 지내고 개학이 되어 서울에 올라와 2학기를 마치면서 다음해에 군에 갔다.

 

입대한 후 같은 후보생들이 내가 불교대학을 나왔으니 내가 불교의식을 잘 아는 출가한 스님인 줄 알고 있었다. 출가 스님에 대한 일반인들의 시각은 계행이 철저하고 남과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성직자로 보는 것이다. 나는 사실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많은 동료들이 나를 그렇게 인정하려 하였고, 나는 불교의 계행이 몸에 베이지 않았지만 웬지 그렇게 노력하고 싶었고, 또한 솜에 물이 적시듯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불교는 확실한 내 것이 아니었다.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관념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관념과 실천이 일치되어 있지 않았고, 폭 삭아지지 않았다. 설익어 있었다는 뜻이다. 소위 장판 때가 묻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떤 일이든지 철저하지 못하면 어설퍼 보이는 것이다.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적 분위기에 젖어 있다 하지만 내가 그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주인이 되지 못하면 언제나 객이 되지, 주인이 되진 못하는 것이다. 나는 부처님이 멀리 있었고 그 부처님이 나를 움직이고 있었지 내가 주체가 되진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서먹서먹했던 것이다. 이론은 이론대로 믿음은 믿음대로 겉 돌고 있었다.

 

성철 큰스님의 말씀을 처음 들은 것은 1966년 쯤의 일이다. 대학선원에서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강의하던 박성배 선생님이 문경 김용사로 성철 큰스님을 따라 출가했다는 것이다. 1958년 문경 정암사에서 지금은 서옹(西翁) 스님이시지만 그 당시 석호(石虎) 큰스님과 성철 큰스님이 참선복광(參禪復光)을 시작했다고 들었지만 확실히 보현행원품을 강의하시고 3000배를 가르치신다는 말을 들은 것은 이때이었다.
그리고 3년 후 눈에 맺힌 해인사를 찾았다. 2년 동안 나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저 징병을 졸병으로 가기에는 나이 들고 해서 장교로 입대했다가 거의 5년간의 장교 복무를 하게 되었고, 그 사이 월남전이 벌어져 1년간 정글에서 전투를 하고 돌아와서 제대를 했었다. 변화라면 엄청난 변화이다. 군(軍)에서 민간(民間)이 되었고,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학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제대를 하고 나니 여러 가지가 막연했다. 대학원을 졸업하여 석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취직할 곳이란 대학교수밖에 마땅한 직업이 없고 그렇다고 대학의 자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또 그때만 해도 취직자리가 많지도 않았고, 있다 해도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쓰지도 않는 시절이었다. 철학과를 나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그러한 환경은 아니었다.

 

여하간 나는 나이로 30이 되었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계기가 되었다. 나는 이제는 불교를 관념적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확실히 공부하고 싶었다. 불교의 교리 중에서 인생무상의 상징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전쟁터에서 감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체험했던 나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보다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불교로 맛보고 싶었다. 마침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이 해인사로 수련하기 위해 떠난다고 했다. 일주일간의 수련대회가 진행되었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3000배를 하고 성철 방장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지금은 정년 퇴직하셨지만 경희대학교의 박성봉 교수님, 시인 박희진 선생님 등과 함께 성철스님을 뵙고 일주일간 ‘윤회의 비밀’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나보다 십년이나 연상이신 박성봉 교수님이 3000배를 끝내고 의기찬 모습과 박희진 시인은 시인답게 3000배를 꼭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고 저항하던 개성 있는 모습이 훤하다.

 

나는 이때 3000배는 처음 했지만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대적광전 앞 계단을 내려올 때 아랫 종아리가 뻐근한 것을 느꼈을 뿐이다. 그리고 성취감을 맛보았다.
1969년 정월은 눈이 많이 왔다. 나는 3000배를 하고 난 후 성철 큰스님의 법문과 ‘윤회의 비밀’을 듣고 난 후 불교 특히 부처님이 나와 함께 몸에 베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10년이나 해오던 매일 아침의 참선과 보현행원품 독송이 서서히 그 참뜻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무엇인지 남아있는 응어리가 있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는 것이었다.

 

1월 2일 나는 큰 결단을 내렸다. 내 인생에 있어서 기도라는 용어가 처음 나왔고, 그 기도를 3000배로 하자는 생각이 처음 새벽별처럼 튀어나왔다. 그렇다. 성철스님께 가서 3000배 기도를 하자.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를 맡기자. 그리고 해인사로 갔다.
스님을 찾아뵙고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청했다. 그때 스님은 대적광전 옆에서 주석하시고 계셨다. 인자하신 모습으로 나를 후히 부드럽게 대해 주시면서 그 당시 총무이신 보성(전 송광사 주지)스님과 스님 방에 기거하게 하면서 매일 3000배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스님께서 친절히 대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일면 서생에 지나지 않는 나를 총무스님과 함께 지내라는데 너무 감격하여 스님 방을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른다. 사실 보성스님은 과거부터 순수하고 티가 없으시고 차별심이 없어서 잘 알고는 있었지만 스님과 속인이 한방에 있게 하신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여하간 나는 스님에게 두 가지 명을 받은 것이다. 그 하나는 스님과 똑같이 생활할 것, 다시 말하면 새벽예불, 사시예불, 저녁예불을 빠지지 말 것, 또 하나는 대적광전 옆 지장전에서 예불 후 1000배씩 3000배를 할 것 등이다.

 

나는 나 혼자 열심히 하루 3000배를 했다. 청수물을 떠올리고 촛불을 켜고 모든 것이 독살이 하는 스님과 같이 열심히 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삼칠일이 다시 말하면 21일간 3000배를 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의 요동이 없으면 그저 주저앉고 마음이 요동하면 그냥 하산하자는 계산을 가지고 갔는데, 하루하루 그 신념이 무너지고 있었다. 일주일간 3000배 기도하고 8일째 아침 1000배를 하고 나니 도저히 자신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출가를 할 수 없다는 나 자신 속에서 여러 가지 이유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출사(出寺?)를 각오하고 스님께 찾아가 “스님, 저는 이제 내려가겠습니다” 하고 한마디 했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기만 하셨다. 그 웃음 속에는 “나는 이미 네가 출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주일이 출가 보다 더욱 소중 할 것이다. 사람마다 할일이 따로 있지”하고 잘 가라고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도 스님께 웃음으로 대답하고 산문을 나왔다.

 

서울로 오니 모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1월 19일까지 출두바람’ 이라는 전보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대학의 강단을 벗어난 적이 없다. 그리고 부처님이 서서히 내 마음속에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때 해인사에서 3000배를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역시 감상적인 불자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관념적인 불자가 아니고 참다운 불자는 적어도 예불의식과 염불, 간경, 좌선을 생활화하고 불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무명(無明)에서 광명(光明)을 얻음이란 바로 여기에 있음이 아니겠는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 환희할 뿐이다.


인신난득 불법난봉(人身難得 佛法難逢)이라 즉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렵다.
사람 몸 얻고 다행히 불법을 만나 불법 속에 사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신세를 갚으려면 부처님 시봉 잘 하고 불공 잘 해야 화(禍)의 업장이 소멸된다. 불공이란 큰스님 말씀처럼 중생을 이익케 하는 것이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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