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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 산책]
미생(未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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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  1996 년 6 월 [통권 제2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8,118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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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탁 / 연세대 철학과 조교수․ 중국불교철학전공)

 

1. 

고 노수석군의 상여가 이제 막 정든 교정을 떠나려 한다. 백양로 한복판에서 함께 밤을 지새던 동지들의 어깨에 실려 고향으로 간단다. 만장은 펄럭이고 조문의 행렬은 꼬리를 문다. 무엇이 그 젊음을 죽음으로 보내는가? 험난한 세상에 태어나 불의를 참지 못하고 항거한 그. 이제는 모두가 사라지고 종합관 101호 강의실은 그가 남긴 자리만 오롯하다.

 

290여 명을 대상으로 하는 대형 강의이다 보니, 마이크를 사용하고 출석은 좌석표를 만들어 조교가 점검한다. 눈을 맞추어 이름을 부르고 “네” 하고 대답하는 그 인연도 우리는 갖지 못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3월 한 달이나 강의실에서 만났으면서도 말이다. 그를 영결하던 날 남은 우리가 칠판에 적었던 왕범지의 시, 그 중 ‘미생(未生)’이란 말은 내 영혼의 깊은 곳에 박혀든다.

산 사람들은 죽은 이를 보내는데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거기는 모든 고통과 욕망이 사라진 곳인가? 거기가 어디에 있는가?

 

我昔未生時 내가 옛날 태어나지 않았을 때

冥冥無所知 아득하여 알 수가 없네.
天公强生我 하늘님이 억지로 날 낳아
生我復何爲 날 낳아 대체 무엇을 하려는가.
無衣使我寒 입을 게 없어 날 춥게 하고
無食使我飢 먹을 게 없어 날 굶주리게 하네.
還你天公我 하늘님, 날 돌려보내주오
還我未生時 태어나기 이전으로 날 보내 주오.

 

2.

노군은 선불교를 강의하는 내 수업의 학생이었다. 뜻밖의 죽음이 생사문제를 다시금 생각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는 도정시(道情詩 : 정을 노래한 시)로 불리우는 왕범지(王梵志 : 7세기 후반 ~ 8세기 전반)의 시이다. 최근 <역대시화(歷代詩話)>에 실린 당나라의 시승 석교연(釋皎然)의 <시식(詩式)>을 배우다 처음 이 시를 접했다. 이 시는 좋은 시가 갖추어야 할 요소인 해속(駭俗), 곧 세속을 놀래키는 멋이 있는 시의 실례로 인용된다.

 

왕범지는 거사 몸으로 선종의 돈오사상에 입각하여 백화시를 썼던 인물이다. 교연스님은 이 시에서 세속을 놀래키는 정취가 서려 있음을 발견했는데, 그러면 과연 무엇이 교연으로 하여금 왕범지의 이 시가 세속을 놀래키는 멋이 있다고 여기게 했는가?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남 보기는 어떻게 저런 고생을 견디는가 하는 사람에게도 당신 죽고 싶소 하면 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것이다. 그런데 왕범지는 오히려 하늘이 억지로 날 낳아 이 고생을 시키니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려 보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세속을 놀래키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시승 교연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던가 보다.

 

‘태어나기 이전’ 이란 선 불교의 특수 용어로써, 특히 송대 이후의 선가에서는 부모가 낳아주기 이전 자기의 참 모습을 깨치라고 강조한다. 왕범지는 시인답게 하늘님이 우리를 낳았다고 시적으로 표현했다. 아무튼 이승에 몸을 받아 태어난 뒤로는, 많은 고통을 겪는다. 그 종류도 가지가지이다. 늙고, 병들고, 그러다가 끝내는 죽는다. 그러는 사이에도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 싫은 상황을 만나야 하는 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일, 일정한 상황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괴로움을 당할 주체가 없어진다. 육신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도 육신의 그것 못지않다. 우선 성내는 마음만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괴로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즐거워할 줄 아는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 있기에, 긴 밤 잠 못 이루던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3.

그런데 마음도 실은 육신에 깃드는 것이다. 육신이 있어 거기에 마음이 붙어서 사는 것이다. 불교학에서 마음을 육신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도 이런 철학적 배경에서 나온 표현이다. 그래서 눈에 깃들어 사는 마음을 안식이라 하고, 나아가 의라는 감각기관에 불어 사는 마음을 의식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러니 이 육신만 없으면, 마음이 깃들 의지처도 없어지고, 결국 이 세상에 오만가지 괴로움이 우리를 엄습하더라도, 그 괴로움을 당할 주체가 없어진다. 태어나지 않으면 괴로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이쯤 되면 태어나기 이전을 동경하는 왕범지의 심정이 가히 이해가 갈 것이다.

 

태어나기 이전의 자기는 생긴 것도 아니고 누가 만든 것도 아니다. 생긴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고, 만들어진 것은 부서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생긴 것도 아니고 만들어진 것도 아닌 태어나기 이전의 자기는 참 자기로서 불생불멸한다. 그 상태는 모든 번뇌가 녹아, 하룻밤 묵었다가는 제 갈 길 떠나가는 길손도 아니고, 털 면 떨어질 먼지도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원히 쉴 수 있고 끝없는 즐거움을 누릴 곳은 부모가 날 낳기 이전의 그 자리이다. 이것을 깨치라고 선사들은 고구정녕 말한다. 이것을 왕범지는 시적으로 표현하여 “태어나기 이전으로 날 보내주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 태어나기 이전의 자기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당연한 물음이다. 왕범지는 “아득하여 알 수가 없네”라고 슬며시 발을 뺀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는 다른 많은 시에서 현실에서 울고 웃는 마음이 바로 태어나기 이전의 참 자기가 활동하는 곳이라고 한다. 현실을 초월한 저곳이 아닌 이곳에 참 자기가 있다고 한다. 왕범지의 이런 철학은 당시 선종의 전통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마음이 바로 부처이지 구해서 얻어지는 대상으로서 부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는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철학이다. ‘마음이 부처이다’라는 말이 처음 문헌에 나타나는 것은 부대사의 <심왕명>이고, 당나라에 들어서는 마조도일 선사에 의해 새롭게 강조되어 선종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현실에 뒹구는 마음은 번뇌의 마음인데 이 번뇌의 마음으로 어떻게 태어나기 이전의 참마음을 알 수 있을까? 또 현실의 이 마음이 부처라고 했는데, 이 마음 말고 태어나기 이전의 참 자기를 찾으라는 말은 서로 모순이 되지 않는가. 이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방법이 바로 무심행(無心行)이다. 참 자기는 단계적으로 구해서 얻어지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심을 떠나 무심해지면 단박에 이 자리에 나타난다. 이런 정신이 바로 조계선종의 종풍인 돈오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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