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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기도]
하면 할수록 힘이 솟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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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필자  /  1996 년 6 월 [통권 제2호]  /     /  작성일20-05-06 08:32  /   조회6,879회  /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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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비심

 

결혼하여 시댁에 와보니, 시댁은 양대에 걸쳐 시골의 조그마한 사찰에 일년에 몇 번씩 기도하러 가곤 하는 집안이었다. 처음으로 절에 따라가 보고 같이 기도를 하게 되면서 차츰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해 대구에 나와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해인사에 계시는 현경(玄鏡)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인연이 깊어지자 스님은 대구에 나오시면 우리 집을 찾아주시고 불교에 관한 책도 가져다주시곤 했는데, 몇 해 뒤에는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 한 권을 주시면서 “이 책 한 권을 일과로 정해 놓고 매일 몇 번씩 읽으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저 시내 사찰의 신도였다. 또한 스님께서는 오실 때마다 성철 큰스님의 친견을 권유하셨고, 절하며 기도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내 생활은 시어른 뫼시고, 남편 수발하고, 4남매의 엄마노릇을 하느라 무척 바쁜 하루하루이었다.

 

몇 해가 지나서 십여 명의 신도들과 함께 현경스님을 따라 백련암으로 큰스님을 친견하러 가게 되었다. 지금의 좌선실인데, 스님께서 나오셔서 법문을 해 주셨다. 내용인즉, 6․25 당시 잃어버린 외아들을 찾기 위해 논밭을 판 돈을 싸들고 첩첩산중 문경 봉암사를 찾아온 한 보살의 이야기였다. 아들을 찾는 방법을 가르쳐 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고 물으니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가져온 돈뭉치를 한 푼도 절에 남겨 놓지 못하게 하고 하루 끼니가 곤란한 마을 주민에게 다 나누어주고, 스님이 시킨 대로 온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공양하고 삼천배를 함으로써 그 아들을 찾았다는 내용의 말씀이었다. 이 법문을 듣고 고행(苦行) 3천배만 하면 모든 것에 불가능은 없다는 믿음을 스스로 가지게 되었다.

 

처음 보는 큰스님의 눈은 불을 켠 듯하여 눈이 부시어 바로 볼 수 없었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위압감에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그저 범인(凡人)이 아니로구나 하는 느낌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뵙는 것만으로도 불교의 심오하고 자비로운 교리를 깨달은 듯, 우리들의 신심은 더욱 깊어만 가는 것 같았다.

현경스님은 나에게 과제를 주셨다. 백일간은 천배하고 다음 백일간은 천오백배를 하라는 것이었다. 손목도 아프고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아 바른 자세로 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바른 자세로 되지 않는 절이라도 열심히 하였다. 또한 능엄신주를 일과로 정해 놓고 매일 아침 외우다 보니 어느 새 줄줄줄 다 외우게 되었다. 그 뒤로도 불교성전과 자비 책 등 불교에 관한 책을 갖다 주시기에 틈틈이 공부를 하고 더욱더 흥미를 갖게 되었다.

 

현경스님은 불교를 제대로 믿으려면 빨리 백련암에 가서 3천배를 하고 큰스님께 화두 타서 바른 공부하는 법을 배우고 아비라기도를 하라고 하셨지만, 그때는 집을 하루도 비울 수 없다는 생각에 매여서 차일피일 하다가 어언 몇 해가 지나고 말았다. 그 후 현경스님은 해인사 주지가 되시고 재임 중에 입적하시게 되었다. 스님이 입적하시고 나자 그때서야 문득 큰스님께 화두 받아서 바른 공부하라 일러주시던 말씀이 가슴에 되살아났다.

 

만사를 제패하고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계신 묘전스님을 찾아가 3천배를 하고 다음날 스님 손상좌 스님과 동행하여 백련암을 찾았다. 큰스님 뵙기를 청하였더니 들어오라 하셔서 같이 간 스님과 함께 들어갔다. 그 스님은 큰스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무엇을 묻든 그냥 말없이 앉아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지만 나를 보시자마자 “어찌 왔느냐” 물으시는데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제 묘전스님 토굴에 가서 3천배하고 큰스님께 화두 타서 공부할려고 왔습니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디 살며 어떤 스님으로부터 불교를 익혔느냐고 물으셨다. 그래 이렇게 저렇게 대답을 하니 큰스님께서는 “대구가 캄캄한 밤중이더니 이제 눈을 뜨고 대보살 하나 나겠구나”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나도 큰스님 법대로 행하면 대보살이 되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겨 “화두는 주십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관음전에 가서 부처님 앞에 오늘 3천배 내일 3천배 하고 가거라 하시며, 부처님께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화두 타서 바른 공부하는 것이 원이라고 말씀드리니, 화두는 약속대로 줄 터이니 다른 원을 말해 보라고 하셨다.

 

마침 수년 전부터 손목에 자갈풍이 있어 팔목에 힘이 들어가는 빨래며 칼질 같은 일을 잘 못하고 있는 처지였고, 발목도 아파서 백일기도할 때 바른 자세로 절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른 자세로 절을 할 수 있게 원을 세우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부처님 앞에 그 원을 세우고 시킨 대로 절을 다하고 내일 가거라 하셨다. 그렇지만 화두 받을 3천배는 어제 했고 오늘은 꼭 집에도 들어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만으로 “지금 스님께서 시키신 절은 할 수가 없습니다. 화두나 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리니, 옆에 있던 비구니 스님이 내 다리를 슬쩍 꼬집으면서 웬 말대꾸냐는 듯한 눈치를 주었다. 어쩌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다가 마침 아비라기도 중이니 절은 못하겠고 법당에 들어가서 다른 신도와 함께 아비라기도를 하고 내일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아비라기도는 중간에 들어갈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 하시며 시킨 절이나 가서 하라고 불호령을 내리시기에 너무나 무서워서 다시는 말씀을 못 드리고 일단은 문 밖으로 나왔다.

 

마침 뜰에 젊은 스님이 계시기에 “스님, 큰스님이 관음전에 가서 오늘 3천배 내일 3천배 하라 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어 보았다.  “큰스님이 시키신 대로 하세요. 보살이 할 수 있기에 시키는 것이니 아무 소리 말고 가서 절을 하십시오.” 그래서 절하다 죽는 일이 있어도 해내야겠다고 작심하고 같이 온 스님을 보내고 곧 목욕하고 법복으로 갈아입고 관음전에 가서 부처님 앞에 원을 세우고 절을 하였다. 2천배를 마치고 저녁 공양을 하고 목욕을 하고 났는데, 젊은 스님이 ‘대구 보살’하며 부르길래 혹시 나를 찾는 게 아닌가 싶어 나와 보니 “큰스님께서 보살을 찾으십니다. 어서 가 보세요” 하셨다. 큰스님 방에 들어가니 스님께서 손수 화두를 써주시면서 “현경스님이 지어준 불명 慈悲心은 그대로 써라” 하셨다. 다시 관음전으로 가서 남은 천배를 마치고 다음날 새벽부터 또 3천배를 시작하여 큰스님 말씀대로 절을 다 마치고 나니 이제는 3천배를 매일 하여도 할 수 있겠구나, 절이란 하면 할수록 힘이 솟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기쁜 마음으로 하산을 하면서 큰절 쪽을 바라보니 법당 안에 현경스님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스님께서 지금의 나를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버스 정거장에 와보니 마침 일요일이라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 틈새에 끼어 차례를 기다리면서 ‘나도 이제는 열심히 기도하여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어 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무심히 아픈 손목을 만져보니 혹은 간 곳이 없고 좌우 손목이 똑같이 반듯해져 있었다. 시키는 대로 절이나 하라고 호령을 하시던 큰스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리며, 그 크신 법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다음해, 47세가 되는 정월부터 아비라기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는 아비라기도가 너무 좋아서 여러 도반들에게 권유하여 한 사람 한 사람씩 데리고 가서 기도에 참여하다 보니 대구신도도 상당수에 이르고 햇수도 어언 17년이나 되었건만 도 닦은 것은 없으니 어찌 보살의 길을 걸었다 하리요. 젊은 신도들께 부끄럽기 그지없을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아비라기도 때였다. 마침 음 10월 15일은 우리 문중의 묘사(墓祠) 일이라 제수를 준비하여야 하기에 이번 아비라기도는 빠지고 3천배만 하고 올 요량으로 백련암에 올라갔다. 원통전 마루 한 구석에서 사시마지 입재를 보는데, 나에게 돌아온 방석이 몇 년 전 큰스님께서 방석을 해 오라는 꿈을 꾸고 만들어 갔던 바로 그 큰 방석이었다. 너무나 감회가 새로워 처음 만배를 해 보리라 원을 세우고 점심 공양 후 방석을 들고 영자당으로 올라가서 절을 시작하였다. 7천배를 하고 나니 도저히 더할 수가 없었다. 내려가 잘려고 문을 여니 뜻밖에 내린 눈이 꼬부랑 길을 다 덮어버려 앞뒤를 분간할 수가 없고, 이미 모두 불을 끄고 잠이 들어 고요하기 그지없으니 소리를 낼 수도 없고, 그냥 자자니 덮을 것도 없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어찌나 황소바람인지 이가 덜덜 떨려서 그냥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다시 절을 시작하였다.

 

천배를 마치자, 새벽 종이 울리고 인기척이 났다. 문을 열어 보니 스님 한 분이 눈을 쓸며 올라오고 계셨다.
“보살님께서 만배 절 하십니까?”
“예, 그런데 아직 덜 했습니다.”
“큰스님께서 보살 한 사람이 영자당에서 만배를 하고 있으니 길의 눈을 쓸라고 하시기에 여기부터 씁니다.”
이제는 발목이 아파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생각하고 내려갈려고 했는데, 그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용기를 내어 남은 절을 시작하였다. 다시 천배를 하고 아침공양을 하고 다기물을 새로 올리고 남은 천배를 하여 만배를 마치니 초도 향도 다 그 몸을 사뤄 자취가 없었다.

 

집으로 가려고 하니 백련암에서 일하시는 처사님이 눈이 와서 미끄럽다며 새끼줄을 신발에 감아주었다. 돌계단을 내려디디자 젊은 스님 한 분이 올라오시길래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청했다.
“평길까지만 좀 도와주세요.”
무사히 돌아와 몸을 풀고 나니, 매년 겨울만 되면 허리가 아파서 고생을 했는데 몸이 거뜬했다. 그 후로는 허리가 안 아프니, 누구는 절을 많이 하면 허리 무릎 못 쓰게 된다고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절을 많이 해서 병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고비를 참고 넘기는 기도이다 보니 인내심이 생기고 복잡하고 급한 마음이 없어지는 듯하다.

 

 


 

그러고 꼭 한번은 3천배 백일기도를 해보고 싶었다, 마침 89년 미국유학 중인 큰아들 가족이 학술대회에 참석차 다녀갔다. 학위 취득을 앞두고 열심히 공부하는 중인데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출국시키고 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지금이 부모로서 어려운 기도를 할 때이구나’ 결심을 하고 7월 백련암 아비라기도 때 가서 부산의 한 보살님과 상의하고 큰스님께 3천배 백일할 것을 자청하여 약속드리고 입제를 하고 집에 와서 매일 첫새벽에 일어나서 3천배를 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힘이 든다기 보다는 사람의 몸이란 쓰면 쓸수록 힘이 나고 능력도 무한함을 새삼 느꼈다. 기도의 힘을 얻고 보니 아들도 몇달 후에 학위를 취득하고 고국에 돌아와서 지금은 대학교 교수로 있으니 믿음직스럽다.

 

1993년에 큰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우리 신도뿐만 아니라 전국민들은 슬픔에 잠겼다. 7일간의 장례준비를 하며 수없이 해인사를 왕래하였다. 힘도 들고 몸살 감기로 고열이 심했지만 맡은 일이 있어 대구 신도들을 번갈아 만나다 보니 어느 새 발인 하루 전이었다. 그날 밤 큰스님 영전을 모신 앞마당에서 백련암 신도들이 아비라기도를 한다기에 나 역시 큰스님 육신이 계시는 앞에서의 마지막 아비라기도라고 생각하고 지친 몸을 끌고 동참하러 나갔다. 이미 발 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터여서 방석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종이 박스 조각 하나 찢어서 깔고 수건 한 장 접어놓고 기도를 하였다. 몸이 고단한 줄도 모르고 무릎 감각도 없이 세 시간의 기도를 마치고 보니 이것은 나의 힘이 아닌 듯한 심경이었다. 모든 행사를 다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서 크게 아프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몸이 가볍고 개운했다. 아마도 큰스님께서 우리들을 보살피고 계신 듯 느껴졌다.

 

그 뒤 한 달이 못 가서 10월 아비라기도가 다가왔다. 적광전에서의 기도는 내가 죽비를 치게 되었다. 열심이 기도하던 회향 전날, 마지막 기도 시간 5분 전인가 보다. 일초가 마치 한 시간처럼 느껴지도록 힘이 드는 시간인데, 눈을 감고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를 힘차게 불렀다. 눈을 뜨는 순간, 후불탱화에서 방광이 뭉턱뭉턱 세 곳이나 번쩍이더니 탱화 전체가 오색찬란한 빛을 띄우고 비로자나불 부처님이 붉은 빛으로 타올랐다. 아, 이것이 방광이구나 하고 외칠려는데 큰스님의 단호한 말씀이 뇌리를 스쳤다.
“아비라 기도 중에는 내가 가든지 어떤 일이 있어도 요동하지 말고 중지하지도 말고 그대로 기도를 마치라.”

 

나는 신심이 북받쳐 더욱더 큰 소리로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하고 부르면서 좌우 보살들에게 저 광경을 보라고 손으로 눈짓으로 앞을 가리키며 흔들었다. 시간이 다 되어 죽비를 세 번 탁탁 치고 마치면서 “부처님 방광을 모두 보셨지요. 한 5분간 그렇게 찬란한 광경일 수 없었습니다” 하니 몇몇 보살님들도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그날 밤 고심원에서도 방광하니 큰스님께서는 생사를 초월하시어 지금 백련암 계신다는 것을 증명한 듯 여겨진다.

 

한 번은 우리 집 처사가 어떤 분의 권유를 받고 사업에 손을 댈려고 수천만원의 계약금을 들고 약속한 장소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업얘기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친구는 그 사업의 내용을 잘 안다고 하면서 진심으로 말리더랍니다. 그래서 계약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나는 괜시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그 사업에 손을 댄 사람은 모두가 실패를 하고 큰 낭패를 봤다는 얘기를 듣고는 무슨 일이든 올바른 해결은 부처님께 맡기기로 하고 매일 3천배를 하였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3천배를 하라는 큰스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이런 행운이 있지 않았나 싶다.

 

아이들 4남매 탈 없이 장성하여 자기들 뜻대로 살아가고, 손자 손녀들 잘 크고 있고, 나와 같이 처사도 하루 일과에 의지해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은덕인 것 같아 감사하고 기도할 뿐이다. 남은 여생은 부처님 제자인 한 보살로 바르게 살며, 큰스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르침과 정신을 거울삼아 마음의 때를 훨훨 벗고 살 작정이다. 대구에도 큰스님의 법도량인 참회원을 보다 번창시켜 불사를 이룩하고, 큰스님이 지어주신 정혜사(淨慧寺) 현판을 걸어 어두운 중생들이 참회할 도량을 이루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인간생활에는 신앙이 꼭 필요하며 신앙 가운데서도 불법이 우리의 주축이다. 이 법을 만났기에 큰스님 같은 분을 인연 지어 법을 닦게 되었고, 바른 기도법을 받아서 익히고 닦으니 큰 힘을 얻은 것이다. 모든 업장이 차츰차츰 소멸되고 자비광명이 비춰지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일과를 지키고 기도를 거듭하여 신심은 날로 커지고, 불법의 인연따라 금생에 못 다 닦으면 후생에 다시 인간 몸을 받아 언젠가는 중생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원이다.

 

지금도 백련암에서는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기도가 일 년에 네 번 행해지고 있다. 큰스님 계실 때 보다 더 많은 신도들이 모여 기도를 한다. 전국의 불자들이며, 해탈의 길로 나아갈 힘을 기르고 참회를 할 수 있는 이 기도에 모두 동참하여 한 번씩이라도 받아보시기를 진심으로 권합니다.
발원하옵건데, 큰스님께서 이 세상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어두운 중생을 제도하여 주옵소서.

 

나무서가모니불
나무서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서가모니불

 

불기 2539년 겨울 대구 참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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