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이 1955년 동안거부터 1963년 동안거까지 머무르던 팔공산 성전암 전경. 김형주 기자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것은 반대쪽이네.” 성철스님이 파계사 성전암 주위에 철조망을 쳤을 때 시자와 스님의 대화다.
“팔공산 성전암에 도착한 것은 반백년 전 가을 단풍이 짙어가던 시기였다. 막상 도착해 보니 오래 동안 건물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주변 환경이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성전암은 풍수설에 따르면 제비집 형국이라 했다. 벼랑에 붙어있는 듯한 집터라 뜰이 넓지 않아 건물을 줄이고 마당을 넓히는 작업을 했다. 독성각은 법당으로 쓰고 나한전에는 스님의 장서를 모시는 등 완전 개수를 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가난을 배우라’고
제자들 가르치며 경전 원전 해독하기 위해
범어ㆍ영어문법ㆍ한문 사서ㆍ일본어도 읽히게 해
스님께서는 성전암에 불공하러 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으며 그 방법으로 암자 주위에 철조망을 치기로 한 것이다. 부산 서면 고철물 시장에서 철조망을 구입해 와서 암자 주변을 완전히 둘러막고 입구에는 문을 달고 안쪽에다 큼직한 자물쇠를 채웠다.”
스님의 맏상좌 천제스님이 당시를 회상하여 쓴 글의 일부이다. 천제스님은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는 동시에 나가는 일도 하지 않기로 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철조망을 친 뜻을 일러주었다.
성철스님은 1955년 동안거부터 1963년 동안거까지 성전암에 머물렀다. 스님이 성전암에 은거하던 시절은 바깥에서는 이른바 ‘종단정화’가 한창이던 때였다. 스님은 “불교정화는 신심과 교화로 이루어져야지 신앙을 폭력에 의지한다면 이는 구적(舊賊)을 신적(新賊)이 축출하는 악순환이 될 것이다”라며 선두참여를 거절했다(천제스님의 ‘회상기’에서 인용).
당시 큰절 파계사에는 한송스님이 어른으로 있으면서 가람중수와 도량질서를 재정립하고 있었다. 한송스님과 성철스님은 금강산에서 함께 정진한 인연이 있었다. 한송스님은 만년에 파계사를 수행도량으로 중흥하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그 일환으로 성철스님을 성전암에 모시기로 했다. 또한 일우스님(전 조계종 전계사)도 파계사에 있으면서 성철스님을 모시는데 크게 기여했다.
새해 들어 지난 1월10일 성전암에 다녀왔다. 겨울바람이 매우 차가운 날이었다. 자동차로 가는 데까지 가서 차를 돌려보내고 성전암 가파른 길로 걸어서 올라갔다. 지난해 세웠다는 작은 일주문을 지나 현응선림(玄應禪林)이라고 쓴 현판을 단 선방 앞에 섰다. 이 선방은 지난 2007년 불에 탔다가 2011년 새로 지었다고 한다. 현응선림 글씨는 회산(晦山) 박기돈(朴基敦)이 쓴 것이다.
스님이 거처하던 선실 뒤편 ‘적묵실’. 김형주 기자
선실 뒤편에 성철스님이 거처하던 작은 방이 있다. 16.5㎡(5평)도 채 안될 것 같았다. 적묵실(寂室)이란 현판이 걸린 이 작은 건물에는 ‘장부자유충천기(丈夫自有衝天氣) 불향여래행처행(不向如來行處行), 장부가 스스로 하늘 찌르는 기운 있거니 부처가 가는 길은 가지 않는도다’라는 주련(柱聯)이 있다.
‘수행자가 참다운 해탈을 성취하면 그때 가서는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祖師)도 필요 없는 대자유(大自由)다. 내 길, 내가 갈 길이 분명히 다 있는데 무엇한다고 부처니 조사니 하여 딴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느냐’는 글이다.
적묵실 오른쪽에 작은 석굴이 있다. 한 사람 들어앉을 만한 이 석굴에는 산속에서 나오는 물이 고인다. 성전암에는 물이 귀해 이 물이 식수로 쓰였다고 한다. 근래 다른 수맥을 발견하여 그 물을 법당 밑 석축 아래 큰 물통에 모았다가 생활용수로 쓰게 되어 다행이라고 한다.
성철스님은 이 작은 암자에서 천제, 성일, 만수스님을 데리고 살았다. 스님은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가난을 배우라(學道須學貧)’고 제자에게 가르쳤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중국 백장스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생활을 했다.
땔 나무를 뒷산에서 져 나르고 채소도 직접 가꾸어 먹었다. 제자들에게 경전의 원전을 해독해야 한다면서 범어(梵語)를 알기 위해 영어문법을 익히게 했다. 한문 사서(四書)를 암송하게 했고 불교 교리의 해설과 이론에 앞서가는 일본 불교를 알아야 한다면서 일본어를 익히게도 했다.
교리 설명에 참조하려고 ‘타임’ ‘라이프’ 잡지도 구해
최신 정신분석학 이론 습득
‘사교입선’ 최상 수행방편으로
초기~대승경전, 선종 어록까지 일관된 이론체계 확립에 주력
사람들은 성철스님의 맏상좌 천제(闡提)스님을 천재(天才)스님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제스님이 스승의 가르침대로 공부하여 범어 영어 일본어에 능통하기에 그렇게들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타임>지나 <라이프>지에 소개되는 당시 최신 물리학 이론과 정신분석학 이론들도 불교 교리 설명에 참조하기 위해 이들 잡지와 학술지를 구하여 읽었다.
“스님은 뒷날 불교의 바른 가르침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시었다. 불교가 시대에 뒤진, 노인들의 전유물로 취급되던 시기에, 그나마 서구 문물의 홍수를 막는 일에 스님의 노고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천제스님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스님은 ‘교를 버리고 선에 든다는 사교입선(捨敎入禪), 선(禪)의 도리를 최상의 수행방편으로 삼으면서도 ‘지혜 있는 사람의 소행은 쌀을 끓여 밥을 지음이요 지혜 없는 사람의 소행은 모래로 밥을 짓는 일(有智人所行 蒸米作飯 無智人所行 蒸沙作飯)’이라는 원효스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해박한 지식과 이해 위에서 선수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철저한 ‘논리불교’를 강조했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대승경전 그리고 선종의 어록까지 하나로 일관된 이론체계를 확립하는 데 주안을 두었다.
성전암에 있으면서 스님은 많은 불서(佛書)를 더 구입하여 자료로 삼았다. 범어 진언(眞言)의 한글 음역을 선도(先導)하고 한문의 간접 음역이 옳지 않다면서 일찍이 만국 표기 음표에 의한 음역을 시도하고 많은 진언을 바르게 독송하도록 했다.
성철스님의 성전암 주석 시절은 뒷날 해인총림에서의 큰 가르침을 준비한 대단히 의미 깊은 기간이었다.
불에 탔던 ‘현응선림(玄應禪林ㆍ현판, 사진)’을 새로 지어 도량의 사격을 갖춘 듯하지만 접근하기 어려운 벼랑에 자리한 작은 도량이다. 김형주 기자
■ 되새기는 성철스님 법어
일체를 존경합시다
일체를 존경합시다. 일체가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체를 부처님으로 받들고 스승으로 섬기며 부모로 모십시다.
우주의 유형무형의 이 법문을 항상 설하여 이 말씀이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모두들 귀가 있든 없든 간에 이 법문을 항상 듣고 있습니다. 더욱이 불교방송을 통하여 이 법문을 전하게 되니 참으로 금상첨화입니다.
모든 가치는 말씀에 있지 않고 그 실천에 있으니 우리 모두 선악과 시비를 초월하여 일체를 존경하여야 합니다.
푸른 허공에서 반짝이는 별님들과 둥근 달님도 쉴 새 없이 벽력같은 소리로 항시 이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일체를 존경합시다.
- 1990년 5월1일 불교방송 개국 축하 법어
[불교신문 2788호/ 2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