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큰스님은 당신 스스로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신 분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고 부처님 행(行)이 아니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평생토록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대원칙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으셨고 후학들에게도 당신의 이런 모습을 여실히 보이신 우리시대의 선지식이십니다.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면 승속을 가리지 않고 무한한 애정과 가차 없는 경책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당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도 당신의 공부인을 아끼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시자가 ‘스님 아무개가 스님 뵈러 왔습니다’ 하면 ‘무슨 일로 왔다카노’를 먼저 물으셨습니다. ‘큰 어른이 계신다기에 친견하러 왔답니다’ 하면 ‘나 그 사람하고 별 만날 일 없다캐라’ 하셨고 ‘스님 뵙고 공부하다가 막힌 것 여쭤보러 왔다고 합니다’라고 하면 ‘그래, 들어오라 해라’하신 분입니다.
‘부처님 법’ 공부하는 사람은
승속 가리지 않고 무한한 애정과
가차 없는 경책으로 이끌어주셔
해인총림 방장 시절 제 은사(일타)스님이 해인사 주지직을 맡으라는 말에 걸망을 미처 다 챙기지도 않은 채 도망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방장 스님은 저를 보고 ‘니, 느거 시님 어데 있는지 알아보고 옷 좀 갖다 주거라’ 하셨습니다. 공부한다고 주지도 마다하고 도망친 제 은사에게 큰스님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공부하겠다고 도망친 그 사실을 흔연해 하셨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이처럼 공부인을 아끼고 감싸주셨습니다. 불법이 앞으로도 천만년 이어지려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근간이 되는 것은 수행인이 수행인의 본분사를 지켜나가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출가수행자는 출가의 초심을 끝까지 지니고 흔들림 없는 정진으로 대도를 성취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재가불자는 자기 자리에서 불자로서의 신행을 여법히 할 때 우리 불교의 앞날은 무한한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릴 때 출가하여 어른 스님들의 귀여움을 받으면서 수행자의 길에 접어들어 생명을 내걸고 참선수행을 실참, 선(禪)의 깊은 경지를 체득하고 출가.재가불자는 물론이고 각계각층 여러 사람들에게 부처님 지혜를 널리 일러주고 있는 혜국스님.
고향 제주도에 남국선원을 창건, 무문관을 만들었고 지금은 충북 충주의 깊숙한 산골 금봉산 속 10만평 땅에 대가람 석종사를 중창하여 부처님의 법향(法香)을 온누리에 번지게 하고 있는 스님을 뵙는 광명을 누렸다.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혜국스님이라면 알 만한 사람들은 승속을 불문하고 ‘20만배(拜) 예참기도 하신 스님, 세 손가락을 연비하여 부처님께 공양하신 스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대해 스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1961년 14살 때 출가하여 1962년 일타스님의 상좌가 되었습니다. 출가 후 여러 선방에서 정진하다 해인사에 왔습니다. 당시에 성철 큰스님은 해인사에 안 계셨고 청담 큰스님이 주지였을 때입니다. 출가를 하고서도 어린 나이에 절에 오느라고 남들이 하는 학교 공부를 못한 게 마음에 맺혀 제주도로, 서울로 다니면서 학교 공부하느라 몇 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서 다시 해인사로 왔지요. 그때는 성철 큰스님이 계실 때입니다. 내 딴에는 화두잡고 참선한다고 하는데도 영 안됐어요. 그래서 참선공부는 접고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呪力)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바꿨어요. 그런 내게 성철 큰스님의 법문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화두참구에 대한 큰스님의 법문에 눈이 번쩍 뜨였고 온 몸에 전율이 왔습니다.
수행자는 출가초심 끝까지 지니고
흔들림 없는 정진으로 대도성취해 일체중생 제도하고
재가불자는 자기자리에서 불자로서 행을 여법히 할 때
불교 앞날은 무한한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말씀…
‘니, 벼락 맞으면서도 화두 안 버릴 자신 있나’ ‘없습니다. 그런 信(신, 믿음)이 안서도 노력을 하겠습니다’ 그런 내게 큰스님은 ‘그럼 네 신을 다지기 위해 하루 5000배 예참기도를 3.7일 해라’ 하셨습니다. 큰스님의 한 말씀이 내 삶에 이렇듯 큰 영향을 끼칠 줄은 몰랐습니다. 7만 배를 하고나니 ‘나’라고 하는 존재는 없어지고 절(拜)만 남았습니다.
신심이 절로 났습니다. 그건 안 해 본 사람은 모르는 일입니다. 10만 배를 끝내고 나니 ‘나도 은사 스님처럼 연비하고 태백산 토굴에 가야지’ 하는 마음이 났어요. 그런데도 연비는 다시 한 번 더 10만 배를 하고 나서야 실행했지요. 20만 배 예참기도가 끝나는 날 나는 아무에게도, 성철 큰스님이나 은사 스님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걸망 싸매고 태백산 토굴에 갔습니다.”
- 태백산 토굴 시절은 어떠했습니까?
“나도 성철 큰스님처럼 장좌불와.생식하겠다고 작심하고 실행에 옮겼지요. 그런데 장자불와한답시고 앉아있는데 자꾸만 어깨가 축 처지고 잠이 와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럴수록 마음을 더 독하게 먹었지요. 내가 이것도 이겨내지 못하고서 공부한다는 말을 어찌하겠느냐, 기어이 이겨낼 거다 하는 마음이었어요.
조금 나아지는가 싶으면 그게 오래 가지 않고 나았다가 되돌아갔다가 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성철 큰스님은 장좌불와 정진 때 정말 졸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심이 불쑥 났어요. 그 의심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어요. 그래서 큰스님께 달려갔지요. ‘스님, 스님께서는 장좌불와 정진 때 정말 졸지 않으셨습니까?’ ‘이놈아야, 내가 목석이가 안 졸거로’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래!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 큰스님께서 철바루를 주셨다는 말씀은 어떤 사연입니까?
“큰스님께서는 내가 좌선할 때 자꾸 허리가 꺾이고 고개가 숙여진다니까 당신의 철바루를 제게 주셨지요. ‘니, 이거 갖고 가라. 그 바루에 물을 담아 머리에 얹고 앉아 있거라’ 하셨습니다. 큰스님 말씀대로 했지요. 그런데 그게 잘 되겠어요? 바루에 물을 담아 머리에 얹자마자 쏟아지고 다시 또 하면 또 쏟아지고….
도저히 안 되겠다는 좌절감이 밀려왔어요. 오죽하면 유서를 썼겠어요? 이것도 못하면 죽어버리자 했지요. 그렇게 근 3개월 지났을까? 어느 날 ‘그래, 오늘 하루만이라도 해 보자. 그래도 안 되면 죽자. 해가 뉘엿뉘엿 지는 걸 보고 물 담긴 바루를 머리에 얹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지요. 그러고 있는데 방안이 훤해지는 거예요.
‘벼락 맞으면서 화두 안 버릴 자신 있나’는 질문과 함께
‘믿음을 다지기 위해 하루 5천배 삼칠일 하라‘는 말씀에
7만배하고 나니 ‘나’는 없어지고 ‘절’만 남았어요
이 법문이 내 삶에 이렇듯 큰 영향 끼칠 줄…
나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 날이 새고 있었어요. 해가 지는 걸 보고 앉았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오는 거였어요. 그 순간 가슴속 깊이 용솟음치는 환희심에 벌떡 일어서는데 머리위의 발우가 꽝! 하고 떨어졌어요. 그 소리와 내가 둘이 아니란 걸 알았지요.
백련암으로 쫓아갔지요. 큰스님은 내가 깨쳤다는 말은 인정하지 않으시고 ‘덕산탁발화 아나?’ 그러셨어요. 전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니, 내가 방 하나 줄게 더 공부해라’ 하시며 백련암 영각에서 공부하라 하셨어요. 3년만 그곳에서 공부하라 하셨는데 중간에 사정이 생겨 나왔어요.”
- 스님께서는 은사 스님이 하셨듯 소지(燒指)공양을 하셨는데 스님 상좌가 스님처럼 하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후유증을 극복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심이 있으면 공부하는데 쏟아 부어라 하겠어요. 그래도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나보고 또 하겠느냐고 물으면 나는 또 하겠어요. 내가 소지할 때 ‘나 스스로 나를 병신으로 만들었는데 이 몸으로 어디가 무얼하랴’는 마음이었거든요. 나는 소지공양 덕을 크게 보았습니다.”
- 후학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고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수좌들에게 가장 큰 고비는 좌절감입니다. ‘나는 참선수행은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게 큰 고비이지요. 그런 고비는 한 번만이 아닙니다. 2~3번 겪기 마련이지요. 고비 때마다 극복해야 합니다. 거기서 꺾이면 평생 못 일어서지요. 고비마다 ‘지금 이 때가 내가 새로 출가할 때다’라고 신심을 더욱 다그쳐서 이겨내야지요. 고비를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충주 석종사에서 혜국스님과 대담을 마친 원택스님(왼쪽)은 지면의 제한된 지면사정으로 훌륭한 말씀을 다 담아낼 수 없다는 아쉬움을 표했다. |
■ 혜국스님은…
1947년 제주도 출생. 1962년 해인사에서 일타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69년 용화사 선원에서 첫 안거이후 해인사 상원사 송광사 칠불사 월명암 수도암 봉암사 등 여러 선원에서 안거 정진했다. 1989년 제주도에 유일한 선원인 남국선원을 창건, 무문관을 개원하고 충주 석종사를 중창, 금봉선원을 개원했다. 2005년 조계종에서 간행한 <간화선> 편찬위원장.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를 맡았고 지금은 금봉선원.남국선원 선원장이다.
[불교신문 2859호/ 10월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