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백련암 주석기반 다지고
김룡사 총무소임 보며 시봉
3000배.15시간 정근…
직계 상좌보다도 더
성철스님 떠나지 않고 보필
우리 불교를 정신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것들을
조목조목 정리하셨지요
그 우선적인 것이
일제강점기 흐트러진
계율정신을 되살려놓은 것…
‘부처님 말씀 알려면
빨리어 공부해야 한다‘ 강조
남방불교에도 관심 갖게 돼
부산 태종대 태종사 조실 도성스님은 올해 세수 94세, 법랍 60세를 맞는다. 1953년 지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구십이 넘은 연세인데도 한겨울 추위에 맨발로 다니는 분이다. 출가이후 하루도 조석예불을 거르지 않았다는 당신 말씀, 이 하나만으로도 스님이 얼마만큼 출가수행자의 길을 올곧게 걸어 왔는지 알 수 있다.
도성스님은 성철 큰스님의 직계 상좌보다 더 성철 큰스님 주변을 떠나지 않고 크게 보필했다. 성철 큰스님의 파계사 성전암 두문불출 때에도 스님은 다른 처소에서 수행하다가 해제 때면 성전암에 와서 성철 큰스님을 뵙곤 했다. 도성스님은 성전암에서 3000배와 ‘15시간 서 있기’를 했다. 성철 큰스님은 당신을 찾아온 불자들에게 3000배를 시키거나 아니면 15시간을 합장한 채 한자리에 서 있게 했다. 도성스님은 이 둘을 다 했다.
성철 큰스님이 성전암을 나와 도선사 김룡사를 거쳐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할 때도 도성스님의 힘이 컸다. 성철 큰스님의 해인사 백련암 주석의 기반을 도성스님이 잡아놓은 것이다. 성철 큰스님이 문경 김룡사 주석 때 도성스님은 총무 직책을 맡아 절 살림을 꾸려나가기도 했다. 이처럼 두 분의 법연(法緣)은 깊고도 진하다. 성철 큰스님 열반 후에도 도성스님은 성철 큰스님의 탄신기념일과 추모재일에는 맏상좌 천제스님이 있는 부산 해월정사에 와서 성철 큰스님을 기리고 있다.
새해를 맞아 지난 7일 도성스님을 뵈러 태종사에 갔다. 스님은 “나보다 더 성철스님의 장점을 아는 사람은 없을거요.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라면서 말문을 열었다.
당신의 출가인연부터 성철 큰스님과의 만남 그리고 지월 자운 영암 석암 석호(서옹)스님과 당신의 인연, 또 성철 큰스님과 여러 큰스님들과의 이야기 등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짧은 지면이라 모두 옮기지 못하는 게 퍽 아쉽다. 이 난에 못다 쓴 사연들은 기회가 나면 상세히 쓸 생각이다.
- 스님께서는 북한에 계시다 6.25 한국전쟁 때 남한에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 계실 때도 절에 사셨습니까?
“1948년 평안남도 맹산군 우랑사(牛囊寺)라는 절에 있었어요. 그 절 너머에 우두암(牛頭庵)이라는 암자가 있지요. 이 암자는 한암스님이 한때 주석하기도 한 암자지요. 6.25가 나고 남한에 내려와 부산 선암사에 갔어요. 그때 선암사에는 석암 지월 향곡스님이 계셨어요. 중이 되려고 왔다니까 받아주지 않았어요. 여덟 번을 쫓겨났지요. 그런 뒤에서야 허락을 받아 중이 되었어요. 석암스님 상좌가 되고 싶었는데 나는 지월스님 상좌가 되라고 하셔서 그렇게 되었지요. 그때 두 분 스님 모두 나를 좋아하셨지만 두 분은 서로가 자기 상좌로 하기에 앞서 ‘저 스님 상좌하라’고 권유하셨어요. 요즘과는 다르지요. 두 분은 그러셨어요.”
- 스님께서는 성철 큰스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스님이 성철 큰스님께 받은 영향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성철 큰스님은 당대의 여러 어른 스님들과 다르셨습니다. 정신적으로 우리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요. 한국불교 앞날의 초석을 다져 놓으셨어요. 우리 불교 앞날을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꼬집고 계셨지요. 우리 불교를 정신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것들을 조목조목 정리하고 내놓으셨지요. 그 우선적인 것이 계율의 정립이었어요. 일제강점기 흐트러진 계율청정 정신을 되살려놓으신 것이지요. <사미율의> <범망경> 등 율장을 정리, 이를 펴셨어요. 보살계 비구계를 설하기는 했어도 성철스님 이전에는 이 율장들을 책으로 펴내 널리 알리려 하지 않았지요. 성철스님은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고 이를 정리하셨지요. 성철스님의 경전섭렵은 깊고 넓기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나만 해도 그래요. 내가 성철스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빨리어를 어찌 알았겠어요? 당시 부처님 말씀을 알려면 빨리어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신 스님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어요. 동국대에서도 그때 빨리어의 중요성을 아는 교수들은 불교학자 중에도 몇 분 되지 않았어요.”
- 후학들에게 ‘성철스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라고 하실 말씀이 있으면….
“모두가 성철스님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후학들이 성철스님 말씀을 제대로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성철스님은 오늘날 우리 선(禪)에 대해서도 잘못된 것을 분명히 일러주셨습니다. 사실 근대 한국의 선이 바로 서게 된 것도 성철스님의 가르침 영향이라고 봅니다. 성철스님은 선의 바른 길, 선수행의 바른 길을 부처님 법에 맞춰 일러주셨는데도 후학들이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 스님께서는 남방불교를 공부하고 겉모습도 우리 스님들과는 다르신데….
“나를 보고 남방 스님들이 입는 가사를 입고 다닌다면서 성철스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내가 이 가사를 입은 지 40년이 넘었어요. 해인사에서 가사불사 할 때 내가 주장했어요. 가사는 옷으로 만들어야지 장엄으로 해서 되겠느냐고요. 태국 스님의 가사를 보고 생각한 것이었어요. 자운스님의 가사도 (도성스님은 가사를 옷이라 했다) 내가 해드린 것입니다.”
- 스님께서 남방불교를 공부하게 된 연유를 일러주십시오.
“그동안 내가 보니까 당대의 선지식이라는 분들의 언행이 내 마음에 존경과 경외심을 일으키기에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근본불교를 공부하는 남방 스님들의 수행은 어떠한지 알고 싶어졌어요. 거해스님이 있어요. 해인사 총림 초기에 선방에서 정진하던 스님이지요. 그 스님을 내가 남방불교를 연구하고 오라고 보냈어요. 거해스님에게 ‘가서 제대로 보고 오라’ 했어요. 무엇이 우리 불교계에 잘못된 것인지를 알아야지 이대로는 본받을 게 별로 없지 않느냐고 했지요. 거해스님은 참으로 여러 곳을 찬찬히도 돌아보고 왔어요. 그 스님 덕분에 나도 그 후에 남방에 가서 잘 볼 수 있었어요. 지금 우리의 간화선과 달리 위빠사나니 사마티니 등 남방불교가 우리 불교와 다른 양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은데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요. 우리도 옛날부터 다 해오던 것이에요.”
- 지금 우리 선방의 수행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먼저 정진하는 스님과 우리의 선을 칭찬하고 싶어요. 선에 대한 열의가 한국만한 데가 없어요. 이것이 한국불교 특징입니다. 그런데 1년 공부한 스님이나 10년 공부한 스님이나 별 다름이 느껴지지 않아요. 선을 하는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경책을 한다고 죽비로 내려치고 법문하는데 크게 고함 지르는 걸 사자후(獅子吼)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있는 게 잘못이에요. 고함지르지 않아도, 가까이서 조용조용히 이야기해도 일러줄 말, 가르칠 말은 다 할 수 있어요. 주장자로 법상을 내려치지 않아도 사자후는 할 수 있어요. 꼭 큰소리라야 사자후인가요? 말씀의 울림이 가슴 깊이 와 닿고 그 여운이 오래 남아 정진에 분발심을 일으키면 그보다 더한 사자후가 어디 있겠어요? 정진하는 방법과 마음가짐을 바꿔야 해요. 내 마음을 옳게 만들어 내 마음을 보아야지요. 내 마음이 성난 마음이면 모든 게 바로 보아지겠어요?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데 어찌 모든 게 깨끗하게 보이겠어요? 시원찮은 그림을 그려놓고 좋고 아름답게 보라고만 하면 그게 되겠어요?”
- 스님께서는 스리랑카에서 제일가는 칭호를 받으신 걸로 압니다. 그것도 외국인으로서는 스님이 유일하다면서요….
“스리랑카 국립 승가위원회로부터 ‘삼붇다 사사나 조띠까’라는 칭호를 받았지요. 내가 남방 가사를 입고 위빠사나를 수행하고 또 이를 많은 사람들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공으로 수여한 것입니다. 스리랑카 불교계에 역사적으로 남길 인물이라 인정하여 수여한 것이지요.”
- 스님께서 지금 태종사에 근본불교도량을 여셨다면서요.
“누구든지 근본불교를 공부할 사람이면 와서 수행하라하지요. 또 기간에 구애받지 않는 출가과정도 있어요. 많이 와서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정리=이진두 논설위원
사진제공=윤재옥 작가
원택스님(왼쪽)과 도성스님이 7일 태종사에서 대담을 마친 후 자리를 함께 했다.

도성스님은…
1919년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 관봉리에서 출생. 1953년 부산 선암사에서 지월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1955년 해인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78년 해인사 주지, 1980년 미얀마에서 수행. 1989년 대흥사 주지, 교구본사주지연합회 회장. 1990년 태국 마하 출라랑콘대학 한국분교 학장. 2003년 스리랑카 국립 승가위원회로부터 ‘삼붇다 사사나 조띠까’ 칭호를 받음. 현 부산 태종사 조실.
[불교신문 2883호/ 1월26일자]